글:2003.11.09. 글 수정,사진:2012년 4월 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밀양시청.표충사 홈페이지를 참조했습니다.
밀양읍에서 구천면으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표충사 근처에 개발되는 석산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비 오는 오늘도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을 반대하며 10만인 소송인단 모집을 위해 단식중인 지율스님이 오버랩되어 나를 미치게 한다.
표충사를 품고 있는 재약산(載藥山)이 바로 그 영산이며, 표충사가 명찰입니다. 재약산은 신라시대때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연마했던 수련장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훈련시키며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본산입니다. 또한 한국 최고의 명의 허준에게 스승인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며 더욱 깊은 의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표충사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서원을 건립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경내에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서원이 있는 것이 바로 표충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약산이라는 이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영정약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라 흥덕왕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정약수는 아직도 표충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해소해주는 감로수로서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 표충사는 죽림사로 불렀으며, 흥덕왕때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부르다가, 조선 헌종 때 청허 사명 기허 대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오면서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늦가을비에 일주문 비석거리 수충루로 이어지는 대리석 포도에 낙엽이 뒹군다. 벤치에 앉아 오래전 추억에 젖어 보지만 로맨틱하긴 커녕 처연스럽고 궁상맞게 느껴진다. 군위 인각사 산신각을 닮은 용도 불명의 전각은 뭐지? 망자를 절에 모시기전 속세의 업보를 끊게하려고 혼을 잠시 머물게하는 송광사의 척주각, 세월각과 동일 목적의 전각일 것이다.
표충사의 중문격인 수충루는 중층 건물로 누각 아래에 문을 설치하여 진입공간을 마련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최근에 건립되었다. 누각의 중앙 칸에는 ‘표충사(表忠寺)’ 편액을 걸고, 좌우 칸에는 호국성사의 충혼을 상징하는‘수충루(酬忠樓)’ㆍ‘천황제일루(天皇第一樓)’라는 편액을 걸고 있다.
가람각. 어느 책에는 중생들의 영혼을 사찰에 모시기 전 혼을 모셨던 전각이라는 설명이 되어 있으나, 일천한 이놈의 상식으로는 통도사의 가람각, 제천 신륵사 가람각 처럼 가람신을 모신 전각으로 알고 있다.
표충사.표충서원
표충사는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또한 표충사 앞에 유물관과 마주하여 자리잡은 표충서원은 표충사와 함께 최근에 건립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모제가 있을 때에 사용되는 장소이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서원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의 이름은 유정, 자는 이환(離幻)이며 사명(四溟)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속성은 임씨(任氏)로 본관이 풍천(豊川)이다. 증조부가 문과에 급제하여 장락원정(掌樂院正)으로 있다가 대구의 수령을 거쳐 밀양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인 수성(守成)은 달성(達城) 서씨(徐氏)에게 장가들어 갑진년(1544) 10월 17일에 아들을 낳으니 사명대사가 곧 이 분이다.
유물관 외부 구시
근래에 새롭게 건립된 유물관은 국보 제75호인 표충사금동함은향완을 비롯하여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및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유품 중에는 그가 입었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을 비롯해 평소에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패도(佩刀)와 여러 종류의 사령문서들도 고스란히 남아 전시되고 있으며, 이 중 많은 수의 유물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현대의 불모(佛母)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2003년에 떠벌렸던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자.
요즘의 학생들은 취업이니, 고시준비니 하여 입학과 동시에 도서관에서 고딩과 같은 생활을 한다하지만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던 분들은 겁나게 논 기억있으시죠? 저 역시 입학 후 책은 멀리하고 아마츄어 야구팀에 가입하여 밤낮없이 합숙을
이 전각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여 정진하던 곳으로 1926년 큰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하고 수행과 자비교화로써 일생을 보낸 효봉대종사가 말년을 보내다 1963년 이곳에서 열반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되었으며,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함께 건물이 건립된 그 이듬해인 1861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한 쌍의 남녀가 안내문이 잘못되었다며 불평하고 있다. 서래각西來閣이 H형 건축이라는데 그네들 눈에는 ㄷ자형으로 비친다길레 넌지시 측면을 가리키며 가보라 했더니 가서는 날 보고 인사하며 웃음 짓는다.
서래(西來), 즉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는 말이니 선방임을 알 수 있으며 효봉 큰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머문 요사로 1860년에 108번뇌를 의미하여 108평, 48원을 상징하여 48칸으로 지은 서래각은 전면 전각에는 서래, 무량수각, 왼쪽 전각에는 우화루, 우측 전각에는 보화루라는 현판이 걸린 독특한 H자형 건물로 낮은 담장 위로 드러나 있다.
‘서래각’ㆍ‘무량수각’ 등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84)의 글씨이다. 만일루는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단은 2단으로 된 6매의 지대석 위에 5매의 면석을 세우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갑석을 짠 단층기단이며, 면석에는 우주탱주가 하나씩 있어 각 면을 둘로 구분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옥신이 다소 큰 느낌이 있다. 옥신에는 매우 넓은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아무런 조식을 더하지 않았으며, 옥개석은 비교적 얇은 편으로 밑에 4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다. 또한 각 층의 옥개석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홈이 있다. 상륜부는 밑에서부터 노반ㆍ복발ㆍ앙화. 보륜ㆍ수연 등을 차례로 올리고 위에 찰주를 세웠는데, 이 부재들 중에는 후대에 보충된 것도 섞여 있는 듯 하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과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인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탑 앞에 놓인 석등 또한 이와 비슷한 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최근 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으로 연꽃모양의 하대석 위에 팔각의 간주를 세워 상대석을 올렸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의 4면에는 창을 내고, 화사석 위에 옥개석을 올린 일반적인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조각수법과 규모로 보아 시대가 조금 뒤떨어진 통일신라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의 전체 높이는 2.4m이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응진전은 1926년의 화재를 모면한 유일한 전각이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건립되어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여 석가여래ㆍ미륵보살ㆍ제화갈라보살의 석조석가삼존상을 모시고, 그 좌우에는 16나한상과 범천ㆍ제석상 및 사자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상들 역시 석조로 조성되었다. 석가삼존상 뒤로는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화기에 의하면 1942년에 조성되어 동상암(東上庵)에 봉안되었던 것을 옮겨와 봉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응진전 나한상
표충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전은 조선후기에 건립되었으나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된 것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바르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활주를 세워놓았다. 공포는 내4출목(內四出目)ㆍ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식이며, 문칸은 정면 5칸 모두가 빗살문으로 가운데 3칸은 사분합의 문을, 양쪽 2칸에는 이분합의 문을 달았는데, 들어올려 차양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탑의 우측은 스님들의 요사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30여년 전 내가 1주일 머물렀던 추억에 젖어 대광전 뜰로 향하며 처음 표충사에 왔을 때의 동선을 더듬다 말고 대광전 지붕위에 눈을 멈추니 용도를 알 수 없는 찰간대(?)가 용마루에 추녀마루에는 궁궐 건축 에 있어야 할 잡상이 삼장법사를 포함 3개가 있다.
만어사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에 시간도 많이 흘렀지만 재약산 산행을 마친 사람들이 사찰을 시장통으로 여기는지 소란스러움이 극에 달해 한 전각에 독성각, 산령각 현판을 각각 단 재미 쏠쏠나는 전각의 맛을 즐기고픈 맘을 앗아가 급히 나오려다말고 긴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노스님이 요사를 나오셔서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님에게로 달려갔다.
추녀마루 잡상
소맷돌
측벽 반야용선
삼사 순례단으로 인해 법당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2012.4,15).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야 하는데, 석가ㆍ약사ㆍ아미타의 삼계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계불은 모두 목불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고 허리가 짧아 매우 근엄하게 보이며, 17세기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중에 전하는 바로는 대광전이 중건될 때 사천의 도솔암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삼세불상 뒤의 후불탱은 1930년에 조성된 송파정순(松坡淨順)ㆍ예운상규(禮雲尙奎) 스님의 작품으로 부처님 주위에 보살ㆍ나한ㆍ천왕 등 권속이 옹위하고 머리 위로는 무수한 화불(化佛)들이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신중단에 걸려 있는 신중탱 역시 이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퇴운일섭(退耘日燮) 스님이 그린 것이다.
법당의 동쪽 벽에는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아미타여래가 관음ㆍ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천상에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다. 화기에는 금어(金魚) 기전(琪銓) 스님에 의해 1885년(고종 22년) 6월 해인사 대웅전에서 조성하여 재약산 표충사 내원암에 봉안하였다고 적혀 있다. 대광전은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화루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대광전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좌측의 평평한 대지 위에 관음전과 나란히 자리잡은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 사찰의 중창과 함께 중건되었으며, 다시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가 1681년(숙종 7)에 중건되었다. 이후 1839년에 표충사를 옮겨오면서 서산ㆍ사명ㆍ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바뀌었다가 1857년(철종 8)에 새롭게 중건되었다. 1926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2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9년에 중수한 것이다.
법당의 내부에는 불단 중앙에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본존으로 석조도명존자입상과 무독귀왕입상이 협시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석조시왕상과 기타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상도
팔상도
칠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부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1897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후에 새롭게 중건된 것이다.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된 칠성탱화만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
효봉선사 부도비 단촐하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기시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초이틀) 일흔 아홉의 나이를 마치셨습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2012.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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