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재약산 표충사

임병기(선과) 2012. 6. 1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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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03.11.09. 글 수정,사진:2012년 4월

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밀양시청.표충사  홈페이지를 참조했습니다.

 

 

밀양읍에서 구천면으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표충사 근처에 개발되는 석산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비 오는 오늘도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을 반대하며 10만인 소송인단  모집을 위해  단식중인 지율스님이 오버랩되어 나를 미치게 한다.

가자!
그만 가자!
스님의 단식을 멈추기 위해 첫차로 내려오신 속가의 어머님 사진
그 사진이 자꾸만 차창에 어려 마음이 무겁다.

 

 

표충사를 품고 있는 재약산(載藥山)이 바로 그 영산이며, 표충사가 명찰입니다. 재약산은 신라시대때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연마했던 수련장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훈련시키며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본산입니다. 또한 한국 최고의 명의 허준에게 스승인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며 더욱 깊은 의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표충사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서원을 건립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경내에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서원이 있는 것이 바로 표충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약산이라는 이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영정약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라 흥덕왕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정약수는 아직도 표충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해소해주는 감로수로서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 표충사는 죽림사로 불렀으며, 흥덕왕때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부르다가, 조선 헌종 때 청허 사명 기허 대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오면서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늦가을비에 일주문 비석거리 수충루로 이어지는 대리석 포도에 낙엽이 뒹군다. 벤치에 앉아 오래전 추억에 젖어 보지만 로맨틱하긴 커녕 처연스럽고 궁상맞게 느껴진다. 군위 인각사 산신각을 닮은 용도 불명의 전각은 뭐지? 망자를 절에 모시기전 속세의 업보를 끊게하려고 혼을 잠시 머물게하는 송광사의 척주각, 세월각과 동일 목적의 전각일 것이다.

 

 

표충사의 중문격인 수충루는 중층 건물로 누각 아래에 문을 설치하여 진입공간을 마련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최근에 건립되었다. 누각의 중앙 칸에는 ‘표충사(表忠寺)’ 편액을 걸고, 좌우 칸에는 호국성사의 충혼을 상징하는‘수충루(酬忠樓)’ㆍ‘천황제일루(天皇第一樓)’라는 편액을 걸고 있다.

 

 

가람각. 어느 책에는 중생들의 영혼을 사찰에 모시기 전 혼을 모셨던 전각이라는 설명이 되어 있으나, 일천한 이놈의 상식으로는 통도사의 가람각, 제천 신륵사 가람각 처럼 가람신을 모신 전각으로 알고 있다.

 

                                                            표충사.표충서원

 

표충사는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여느 전각들과는 달리 전면의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 것이 이채롭다.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또한 표충사 앞에 유물관과 마주하여 자리잡은 표충서원은 표충사와 함께 최근에 건립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모제가 있을 때에 사용되는 장소이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서원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당 3대사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 지금의 위치인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짓고 절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기고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대체하였다. 현재의 건물 구성 및 배치는 원래의 서원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반적인 서원의 구성 및 배치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의 이름은 유정, 자는 이환(離幻)이며 사명(四溟)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속성은 임씨(任氏)로 본관이 풍천(豊川)이다. 증조부가 문과에 급제하여 장락원정(掌樂院正)으로 있다가 대구의 수령을 거쳐 밀양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인 수성(守成)은 달성(達城) 서씨(徐氏)에게 장가들어 갑진년(1544) 10월 17일에 아들을 낳으니 사명대사가 곧 이 분이다.

7세에 조부로부터 사(史)를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수학에 들어간다. 13세에는 고향을 떠나 황악산 아래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을 찾아가《맹자》를 배웠다고 한다. 이때에 유학의 기본은 다 배운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직지사로 들어가 신묵(信默)화상을 뵙고 머리를 깎는다. 18세 되는 신유년(1561)에 승과에 합격하니 문정왕후에 의해 승과가 부활된 이래 식(式)년으로 4회에 해당한다. 승과에 급제한 후 스님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당시의 쟁쟁한 문사, 대부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유학자들과의 교류기는 30세쯤에서 끝나고, 32세 때에는 교단의 중망에 의해 당시 선종의 수사찰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나 굳이 사양하고 묘향산의 청허(淸虛)스님을 뵙고 성종(性宗)을 배운다.

여기서 스님은 지금까지의 문장의 유희는 단지 기어(綺語)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직 안심정성(安心定性)에 뜻을 두어 3년을 고행한 끝에 정법을 얻게 된다. 35세에 청허스님을 하직하고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38세에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거쳐 43세 되던 해 봄에 스님은 옥천산의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常)의 법리를 깨달아 대오한다. "어제 핀 꽃 오늘은 빈 가지뿐, 인생도 그와 같은 법, 삶 역시 하루살이 같은데 광음(光陰)을 허송할 건가. 너희들도 영성(靈性)을 갖추었는데 일대사(一大事)를 마치지 않으며 부처도 내마음 속에 있거늘 어찌 밖으로만 내닫는가." 밤사이 소나기에 뜰안의 꽃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제자들을 불러 타이른 선게(禪偈)다. 이후 스님은 홀로 선실로 들어가 열흘간이나 선정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도(悟道)의 법열을 혼자 즐기심인가? 실로 봉은사의 주지직을 떨쳐 일어난 지 10년 만의 일로서 그 의미를 마무리하신 것이며 청허스님으로부터의 득법을 멋지게 결실하신 증득법의 시기라 하겠다.

이후 스님은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약(靈鑑蘭若)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정여립의 역옥(逆獄)사건에 걸려들어 강릉부에 구속된다. 그러나 그곳 유생들이 스님의 억울함을 진정하여 곧 풀려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서산대사도 모함을 받아 선조는 친히 국문하여 무죄함을 가린다. 47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49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는데, 이로부터 오직 분충구국(奮忠救國)의 길로 일관하다가 64세에 치악산으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선조의 승하소식을 듣고 배곡(拜哭)하고는 병을 얻어 해인사로 가 병을 치료한다. 광해군이 여러 차례 약을 내리고 방백으로 하여금 서울로 송치하여 병을 고치게 하려 했으나 경술년(1610) 8월 26일 입적하였다. 문도들이 유골을 거두어 해인사 서쪽에 부도를 봉안하였다. 문하에 송월응상(松月應祥) 등 많은 제자가 있고, 영조는 밀양에 <표충사(表忠祠)>란 액(額)을 내리어 스님의 충(忠)을 기리게 하였다.

스님의 구국분충의 바탕에는 불살생(不殺生)이 내재해 있다. 그것이 너무도 지극했기에 설보화상(說寶和
尙)이란 별명이 가능했으며, 사명감에 철저했기에 동래부사 송상윤(宋象允)을 선참(先斬)하고 후계(後啓)했다는 설화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불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스님의 분충은 조선시대에 일관해 오던 억불정책의 명분을 다소나마 약화시켜 조선불교가 그 맥을 이을 수 있도록 한 전기를 마련한 점이라 하겠다.

그 외에도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구하고 평양성 탈환과 서울 수복, 산성(山城) 구축과 군량과 무기 비축,4차에 걸친 강화회담과 일본에 가서 화약을 맺고 동포 3천명을 데리고 나온 일, 강탈해 간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를 찾아와 건봉사에 봉안케 하는 등 구도자로서 호국불교의 맥을 살린 스님의 종교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나이 67세, 법랍 54년으로 입적하였다.

 

유물관 외부 구시

 

근래에 새롭게 건립된 유물관은 국보 제75호인 표충사금동함은향완을 비롯하여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및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유품 중에는 그가 입었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을 비롯해 평소에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패도(佩刀)와 여러 종류의 사령문서들도 고스란히 남아 전시되고 있으며, 이 중 많은 수의 유물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표충사함은향완...사찰관광정보

 

박물관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향완은 불전에 예배드릴 때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공양구로, 비록 크기는 작지만 불전에 올리는 공양구인 만큼 온갖 정성을 기울여 만들게 되는 물건이다. 또한 향완은 흔히 말하는 향로와 다르지 않은데, 향로라는 말 대신 향완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이 표충사 향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우수한 은입사 향로들이 자체에 ‘향완’이라는 기명(記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으며,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 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고, 몸체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의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준다.

 

제작연대는 넓은 전의 안쪽 면에 57자의 은입사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 1177년(고려 명종 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받침 부문 안쪽 면에 ‘창녕북면용흥사(昌寧北面龍興寺)’라는 명문이 있어 창녕에 있는 용흥사라는 절에서 조성되어 표충사로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보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현대의 불모(佛母)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2003년에 떠벌렸던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자.

 

요즘의 학생들은 취업이니, 고시준비니 하여 입학과 동시에 도서관에서 고딩과 같은 생활을 한다하지만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던 분들은 겁나게 논 기억있으시죠? 저 역시 입학 후 책은 멀리하고 아마츄어 야구팀에 가입하여 밤낮없이 합숙을
빙자한 막걸리에 절어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통키타, 청바지 문화에 젖기도, 허름한 동시에 두 편을 상영하는 3류 영화관에서 신성일, 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 염복순의 영자의 전성시대, 장미희의 겨울여자, 77번 아가씨, 꼬방동네 사람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고래사냥, 한수산의 부초(그 시대 맞나?), 김동길,김태길,박종홍,이희승,양주동,함석헌,김형석님 등의 영화, 소설,에세이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내던 시절  고딩선배의 권유로 불교 동아리에 가입 후 여름방학 일주일 동안  표충사에서 산사체험을 했었다.

그 때의 가람배치는 지금과 많이 달랐지만 다음 답사기에 기술하기로 하고, 약 30년  전으로 돌아가 보겠다. 사찰체험을 정확하게 되살릴 수는 없겠지만 30여 명의 남녀가 지금의 종각 옆 요사에 기숙하며 새벽 3시 도량석과 더불어 이어지는 예불, 청소, 바루공양, 불교기초교리 공부참선, 원력,저녁예불 등 같은 일상을 일주일 동안 반복하였다. 또한 별빛과 달빛이 어울리는
밤 미리내를 바라보며 개울가에서 김태곤의 송학사, 박인희의 모닥불을 나직이 부르며 선후배들과 쌓았던 추억은 늘 잊혀지지 않는다. 재주 없는 나를 제외하고 많은 동아리 선후배가 결혼하여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지나고 나서야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원력시간에 사미승들과 테니스 공으로 야구시합을 하다 큰스님에게 들켜 30도가 넘는 한 낮에 저녁도 굶으가며 8시간에 걸쳐 올린 참회 3000배에 모두들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에피소드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추억. 83년 입사 시험 발표를 기다리던 중 친척분이 뜬금없이 선을 보란다.부모님이야 졸업도 안한 학생이 무슨 맞선이냐고 했지만 시간이 남아돌던 내 귀에는 굿뚜뉴스이지 않은가? 그 아가씨를 첫날부터 꼬셔 댈구 간 곳이 표충사였으니...중매결혼은 죄라 여겼기에 하루 데이트를 즐길려던 생각이었는데 마담뚜의 노력으로  지금은 한 이불을 덮고 살고 있다. 마눌에게 결혼 후 표충사 첫 데이트 느낌을 물었더니 대웅전 법당에서 삼배를 올리던 내 모습이 그렇게 미더워 보였단다.
그리고 나는 기억조차 없는데 백일기도 도장(道場)의 한문을 도량으로 읽기에 머리 속에 든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완존히 속았다고 그러더군 푸헐헐헐...

마눌은 눈치 못 챘지만 그 날 진땀나는 일이 있었으니, 마눌과 데이트 후 내려오다가 우리 동아리에서 나를 무척이나 따르던 후배 여학생 한 명이 과 야유횐지 뭔지 표충사에 들렸다가 순진무구(?)하다고 모셨던 나와 아가씨의 데이트 장면을 목격하고쇼크로 백일을 입원했다나 어쨌대나?  졸업생 환송회 날 술에 취해 선과 형! 샤끼야!! 주글래!!! 라며 어깨를 기대던 그 후배가  보고접다. 잘 살겠지???

90년대 어느 날. 표충사 뒤 재약산으로 등반을 갔었다. 동동주에 취한 상태서 고사리 분교에서 족구 시합중에 다리를 다쳐 동료들에게 업혀 내려왔던 추억도 잊을 수 없으니 표충사는 이래 저래 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람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2003.11.09]

 


만일루. 경내 서북편에 있는 만일루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1860년(철종 11)에 월암선사가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의 전각을 세워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무량수각 또는 서래각이라 하였다.

 

이 전각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여 정진하던 곳으로 1926년 큰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하고 수행과 자비교화로써 일생을 보낸 효봉대종사가 말년을 보내다 1963년 이곳에서 열반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되었으며,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함께 건물이 건립된 그 이듬해인 1861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한 쌍의 남녀가 안내문이 잘못되었다며 불평하고 있다. 서래각西來閣이 H형 건축이라는데 그네들 눈에는 ㄷ자형으로 비친다길레 넌지시 측면을 가리키며 가보라 했더니 가서는 날 보고 인사하며 웃음 짓는다.

 

 

서래(西來), 즉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는 말이니 선방임을 알 수 있으며 효봉 큰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머문 요사로 1860년에 108번뇌를 의미하여 108평, 48원을 상징하여 48칸으로 지은 서래각은 전면 전각에는 서래, 무량수각, 왼쪽 전각에는 우화루, 우측 전각에는 보화루라는 현판이 걸린 독특한 H자형 건물로 낮은 담장 위로 드러나 있다.

 

‘서래각’ㆍ‘무량수각’ 등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84)의 글씨이다. 만일루는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단은 2단으로 된 6매의 지대석 위에 5매의 면석을 세우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갑석을 짠 단층기단이며, 면석에는 우주탱주가 하나씩 있어 각 면을 둘로 구분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옥신이 다소 큰 느낌이 있다. 옥신에는 매우 넓은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아무런 조식을 더하지 않았으며, 옥개석은 비교적 얇은 편으로 밑에 4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다. 또한 각 층의 옥개석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홈이 있다. 상륜부는 밑에서부터 노반ㆍ복발ㆍ앙화. 보륜ㆍ수연 등을 차례로 올리고  위에 찰주를 세웠는데, 이 부재들 중에는 후대에 보충된 것도 섞여 있는 듯 하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과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인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탑 앞에 놓인 석등 또한 이와 비슷한 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최근 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일괄출토품(三層石塔一括出土品)

이 불살들은 1955년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을 복원하던 중에 발견된 것들이다.
모두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제작된것으로, 청동에 금을 입힌 금동불이 주류를 이루고있다. 대부분
머리나 대좌 및 광배 등이 파손된 상태로 미루어 조선시대에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매납된 것으로 추정된다.이처럼 파손된 불상을 탑에 매납하는 행위는 기능을 다한 불신을 부처님의 묘처에 안장하는 의미가 있다.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으로 연꽃모양의 하대석 위에 팔각의 간주를 세워 상대석을 올렸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의 4면에는 창을 내고, 화사석 위에 옥개석을 올린 일반적인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조각수법과 규모로 보아 시대가 조금 뒤떨어진 통일신라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의 전체 높이는 2.4m이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응진전은 1926년의 화재를 모면한 유일한 전각이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건립되어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여 석가여래ㆍ미륵보살ㆍ제화갈라보살의 석조석가삼존상을 모시고, 그 좌우에는 16나한상과 범천ㆍ제석상 및 사자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상들 역시 석조로 조성되었다. 석가삼존상 뒤로는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화기에 의하면 1942년에 조성되어 동상암(東上庵)에 봉안되었던 것을 옮겨와 봉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응진전 나한상

 

 

표충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전은 조선후기에 건립되었으나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된 것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바르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활주를 세워놓았다. 공포는 내4출목(內四出目)ㆍ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식이며, 문칸은 정면 5칸 모두가 빗살문으로 가운데 3칸은 사분합의 문을, 양쪽 2칸에는 이분합의 문을 달았는데, 들어올려 차양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탑의 우측은 스님들의 요사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30여년 전 내가 1주일 머물렀던 추억에 젖어 대광전 뜰로 향하며 처음 표충사에 왔을 때의 동선을 더듬다 말고 대광전 지붕위에 눈을 멈추니 용도를 알 수 없는 찰간대(?)가 용마루에 추녀마루에는 궁궐 건축 에 있어야 할 잡상이 삼장법사를 포함 3개가 있다.

 

 

만어사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에 시간도 많이 흘렀지만 재약산 산행을 마친 사람들이 사찰을 시장통으로 여기는지 소란스러움이 극에 달해 한 전각에 독성각, 산령각 현판을 각각 단 재미 쏠쏠나는 전각의 맛을 즐기고픈 맘을 앗아가 급히 나오려다말고 긴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노스님이 요사를 나오셔서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님에게로 달려갔다.

스님!
대광전 용마루에 놓인 장식물의 용도가 궁금합니다?
.
.
.
.
.
응 그거?
피뢰침이야 피뢰침!!!

 

 

추녀마루 잡상

 

소맷돌

 

 

측벽 반야용선

 

 

삼사 순례단으로 인해 법당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2012.4,15).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야 하는데, 석가ㆍ약사ㆍ아미타의 삼계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계불은 모두 목불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고 허리가 짧아 매우 근엄하게 보이며, 17세기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중에 전하는 바로는 대광전이 중건될 때 사천의 도솔암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삼세불상 뒤의 후불탱은 1930년에 조성된 송파정순(松坡淨順)ㆍ예운상규(禮雲尙奎) 스님의 작품으로 부처님 주위에 보살ㆍ나한ㆍ천왕 등 권속이 옹위하고 머리 위로는 무수한 화불(化佛)들이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신중단에 걸려 있는 신중탱 역시 이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퇴운일섭(退耘日燮) 스님이 그린 것이다.

 

법당의 동쪽 벽에는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아미타여래가 관음ㆍ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천상에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다. 화기에는 금어(金魚) 기전(琪銓) 스님에 의해 1885년(고종 22년) 6월 해인사 대웅전에서 조성하여 재약산 표충사 내원암에 봉안하였다고 적혀 있다. 대광전은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화루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대광전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좌측의 평평한 대지 위에 관음전과 나란히 자리잡은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 사찰의 중창과 함께 중건되었으며, 다시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가 1681년(숙종 7)에 중건되었다. 이후 1839년에 표충사를 옮겨오면서 서산ㆍ사명ㆍ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바뀌었다가 1857년(철종 8)에 새롭게 중건되었다. 1926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2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9년에 중수한 것이다.

 

 

 법당의 내부에는 불단 중앙에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본존으로 석조도명존자입상과 무독귀왕입상이 협시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석조시왕상과 기타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상도

 

 

팔상도

 

 

칠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부에 걸려 있는 현판에는 1897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후에 새롭게 중건된 것이다.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된 칠성탱화만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

 

 

 

효봉선사 부도비

단촐하다.
하지만 그 무게에 감히 고개들 수 없는 엄숙함이 배여 나오는 바위위에 얹혀 있는 자연석으로 조성된 부도를 향해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예를 갖추며 예전에 읽었던 효봉선사의 일대기를 더듬어 본다.

[효봉선사(曉峰禪師)는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 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섯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하셨습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날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스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으로 사셨습니다.
서른 여섯에 오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늦깍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습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그러나 불가의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것이 아니라, 내자신이 스스로 참구(參究)하면서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게 됩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지고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의 마흔 다섯되던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스님이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신구도관을 가게 되셨습니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기시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초이틀) 일흔 아홉의 나이를 마치셨습니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기시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초이틀) 일흔 아홉의 나이를 마치셨습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201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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