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스크랩] 밀양...표충비각

임병기(선과) 2008. 6. 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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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 일명 사명대사비는 이 곳 무안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당 유정 스님의 공을 기리기위해 영조 18년(1742)에 세웠다. 

 

조선 시대는 불교가 핍박 받았지만 문정왕후는 보우를 기용 불교 중흥을 꾀했었다. 왕후의 공과는 차치하고 만약 명종 재위시 승과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유정스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저런 상념을 주색이 감도는 일단의 관광객이 깨우고 만다.

 

 

삼비문. 삼비 三碑는 표충비에  세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비석 정면은 사명대사 행적, 뒷면은 서산대사와 임진왜란 시 공을 세운 기허대사 행적, 측면에는 표충사 사적이 남아 있다.


본래 이자리에는  사명의 5대 법손 남붕대사가 사액을 받은 표충서원 사당자리 였다. 후에 사당이 재약산 표충사로 옮겨가고 비만 남았다.

답사 매니아에게는 익숙한 표충사 영내에 서원과 절집이 공생하는 독특한 배치가 된 먼 이유가 이곳에서 비롯 된 것이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다. 나라에 불행이 다가오면 땀을 흘린다고 하여 땀 흘리는 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조 재위시 이의현이 비문을, 김진상이 글씨를 썼고 비의 명칭은 유탁기의 글씨라고 한다. 

까만 대리석 비신의 비문은  표충사 내력,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내용, 정유재란 이후 선조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 3천여명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고 한다. 

 

과학, 이론 그런 상황은 저리가라!!

때로는 이성적 논리보다 우리 할머니의 믿음이 더욱 숭고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기도는 하지 않기에...

 


홍제사. 절집이 비각을 관리하는지 비각이 절집을 보호하는지 알 수 없어도 어울렁더울렁 공생의 장이다. 윤기(?)나는 절집 마당에서 어느님이 슬쩍 묻더군요.

"사명당, 유정, 홍제 칭호의 의미가 무어냐고?"

사명당은 호, 유정은 출가후 받은 법명, 홍제는 사후 나라에서 내린 시호로 '자통홍제존자'를 줄여 칭한 말이다.

 

2006.10.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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