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정읍시

정읍...망제동 석불 입상.석등

임병기(선과) 2012. 5. 1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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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헤매이다 돌아왔던 길. 그런 추억을 반추하며 만난 옛님이다. 예전과 달리 도로변에 입간판이 보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비는 엉뚱한 방향을 고집스럽게 멘트하였지만 예상했던 코스를 따라가니 멀리 여산(?) 송씨 재실 영모재가 보인다. 사전에 인지한대로  망제동 석불입상은 그 옆에  그렇게 기다리고 계셨다. 정읍 공단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 입간판을 따라 진입하여 우측 산자락 재각 처럼 보이는 건물에 포커스를 맞추면 된다.

 

 

두승산의 동쪽 줄기로 뻗어 내린 망제봉 산 중턱에는 충암절벽이 무섭게 솟아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여자 치마폭과 비슷하다하여 치마바위라 부르고 있다. 망제동 석불입상은 바로 이 바위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대암리(大岩里)라 부른데서 대암석불이라 했다. 폐사지 총람 자료에는 이곳이 망월사지라고 보고 있다.  망월사는 신동국여지승람에는 고부군 도순산에 있다는 기록이 보이고 1799년 발행된 범우고에는 이미 폐사되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망제동 석불은 조선조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익재 이희맹 선생과의 일화가 전한다. 이희맹(李希孟).호(號)는 익재(益齋),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1516년(중종11)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변무사(辨誣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皇帝) 무종(武宗)을 설복하여 외교 활동에도 능함을 보였으며 그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 4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별세 소식을 전해들은 중종(中宗)대왕은 『인물의 탁월함은 보통에서 뛰어나고 깊은 도학(道學)은 군자와 견줄 바 없다.』 라는 제문(祭文)을 내려 애도했다.

 

신종우의 인명사전 이희맹으로 검색하여 얻은 전설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린 시절이었다. 서당에서 글을 읽는데 그 향학의 열정은 대단했다.옆에서 어떠한 유혹이 있어도 꼼짝 않고 글읽는데에만 전념했다.어린 시절 그의 유일의 꿈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꿈을 키우는 가운데 그의 피나는 글공부는 계속되었다.글을 읽다가 피곤하여 쉴때는 대암석불 있는 곳을 자주 찾았다.산세도 좋고 주위 경관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이곳을 찾는 것이었다.어느 날도 역시 이 정든 석불을 찾았다.잔디 위에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며 맑은 하늘 아래 푸른 꿈을 새기고 있었다. 역시 그날도 석불을 떠나면서 석불 가까이 가서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기도 중인데 『너의 정성이 지극하구나. 네가 과거에 꼭 합격하려든 경서(經書)의 이러이러한 대문을 정통하도록 하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기도한 그는 석불의 계시임을 알고 고맙게 여겨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왔다.그 뒤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 석불이 가르쳐준 대목에 대해서는 철저히 암송했다.얼마 후, 친구 하나가 이런 이야길 했다. 그 전에 자네가 석불에게 기도하고 있을 때 내가 석불 뒤에 숨어 있다가 장난 삼아 한 말을 기억하는가? 하는 것이었다.그것은 친한 친구가 장난 삼아 한 일이었다.그 말을 들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은 부처님께서 자네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감응의 계시가 이미 내려졌던 것이네. 그러니, 나는 그것이 자네의 말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라 믿고 있네.』 하는 것이었다.그는 진실로 석불의 계시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익재는 분골쇄신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시험을 치르게 되었다.시험을 치르는데 석불이 계시한 대로 시험문제가 출제되었다 한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하니 부러운 청춘이었다."



 

문화재청 설명을 보자. "머리에는 방갓과 같은 테가 큰 원형의 모자를 쓰고 있어 유교적인 성격이 가미된 불상이다. 양눈은 살며시 감았고, 코는 직선으로 처리되었고, 귀는 불상으로는 작은 편이다. 의상은 턱 밑에 U자형의 목둘림이 내려져 있고, 복부 아래에 V자형으로 처리되고, 손목아래에는 세줄의 평행선이 내려지고 있다. 수인은 시무외인 , 여원인으로 처리되었다. 어깨가 움추려진 점에 이 불상은 얼굴과 손부분에 공력이 집중된 불상이며, 민속적인 특색을 띤 불상의 하나이다."

 

마륵불로 불리어지지만 통인 수인의 입상불은 아미타불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갓을 쓰고 있어 유교적인 성격이 가미된 불상이라고 설명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고려시대 석불로 알려진 불상에 세월을 앞서 조선이 건국되기전에 유교적인 성격을 가미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조선 이전 갓을 쓰고 있는 많은 불상들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또한 민속적인 특색은 무엇을 뜻하는지? 인터넷상의 많은 글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여간 당황스럽지 않다.

 

오히려 불신과  대좌에 새겨진 두 발이 서로 맞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전설에 의하면 대암석불이, 정들었던 익재(이희맹)가 그리워지므로 그가 현감으로 있는 해남 방향을 바라보기 위하여 대암석불이 스스로 걸어 나간 것이라 전하고 있다."

 

 

팔강 원당형의 석등이다. 하대석에는 복련이 곱고 간주석은 팔각이며  상대석은 결실되고 화사석이 바로 놓여 불안하다. 옥개석도 마모가 심하고 상륜은 남아 았지 않다. 석불과 동시대에 조성된 망월사 석등이었을 것이다.

 

 

기왕이면 고증을 거쳐 석등을 불상 앞으로 옮기고 배례단은 그 뒤에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불상과 석등을 나란히 배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석불입상 대좌 안상에 새겨진 향로에서 그윽한 향내음이 봄날  아지랑이 모습으로 아른아른 피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나무 아래에서 그냥 늘어지게 한 숨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세상사  남가일몽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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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했던 대중 스님도 물처럼 바람처럼 만행길에서 돌아오지 않아  부처님은 홀로 수백년 동안 봄볕을 쬐고 있다. 그러나 올 봄이 아니면 내년 봄에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버린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기다림은 정이고 믿음이기에.

 

                                                                             201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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