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진주시

진주...진주성

임병기(선과) 2012. 2. 22. 06:21

 

 

1977년 10월 개천제 축제에 처음으로 방문한 이래 답사.업무 등등으로 무수히 많이 다녀온 진주. 근자에 유등축제 때 밤에 온 적은 있지만 그때도 남강변을 거닐었을 뿐이다.운좋게도 진주성은 동절기에도 10시 까지 개방되어 처음으로 밤에 진주성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진주성 전투. 행주,한산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전투로 불리우는 전투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산화한 전투. 최경회 논개와 의암.호국사. 임진왜란을 테마로 전시한 진주박물관. 김시민 장군과 학봉 김성일 등 하나의 주제로도 대하소설을 엮을 스토리가 무궁무진하지만 그건 전문가들의 역활로 두고 눈으로 즐기자. 간단한 자료는 위키백과에서 가져왔다.

 

 

남강.진주성 입구

 

 

촉석문.진주성의 정문이다.

 

수주 변영로의 논개 시비는 늘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논개...수주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 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情)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진주성(晉州城)은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석성으로, 사적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은 남강(南江)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은 1.7km에 이른다. 본래 백제 때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으며,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0월 1차진주성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2차 진주성전투는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論介)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고, 1984년에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개장을 하였다.

 

진주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남강과 절벽에 지어진 진주성과의 잘 조화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건축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진주성 내에는 정문인 촉석문과 후문인 공북문, 그리고 망루인 촉석루와 서장대, 북장대를 비롯하여 사찰로는 호국사가 있고, 사당으로는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충절의 여인 논개를 모신 의기사, 임진왜란 때 전몰한 순국영령들을 모신 창렬사가 있으며,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 명성이 높은 국립진주박물관과 문익점의 장인이자 베틀을 발명하여 의생활을 혁명을 일으킨 정천익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등 많은 주요 시설물들이 있다.

의암

 

의암 논개가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빠져 죽은 바위로 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3년 계사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촉석루에서 전승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논개는 촉석루 아래의 이 바위로 적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었다.1629년 인조7년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鄭大隆)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진주에 정착을 해서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고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남강가 의암바위 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는 영남 제일의 누각이다. 1241년 려 고종 28년에 부사 김충광에 의해 창건되여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처음에는 장원루라고 부르다가 조선 초기 기록에 촉석루로 명명되게 된다. 임진왜란 중에서는 지휘본부로 사용되었고, 1593년 7월 29일 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화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촉석루의 뒷쪽으로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고 아래로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서장대

 

진주성 서문의 목조팔작 기와건물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에는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 외침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위한 지휘장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쪽의 서장대, 북쪽의 북장대, 남쪽의 남장대로는 촉석루가 있다. 남강을 따라 절벽 위에 쌓은 진주성의 서쪽 벼랑 끝에 지어져 있으며,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명명되어 있고, 규모는 작지만,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한다.현재의 건물은 소실된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에 의해 중건되었고, 현판은 1979년 은초 정명수가 다시 글씨를 다시 썼다. 정면으로 3칸, 측면 2칸의 팔자형 팔작 지붕을 올린 목조기와집이다.

 

포루

북장대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소실된 것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내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내와 성외의 포진까지 살피며 지휘할 수 있었던 곳으로 편액은 진남루(鎭南樓)라고 되어 있다.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락집형 건물이다. 건물 위에는 좌측으로 인사동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비봉산이 보이며, 오른 편으로는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촉석루중 삼장사는 矗石樓中三壯士
잔을 들고 웃으며 강물을 가리키노라一杯笑指長江水
강물은 도도히 흘러 가니長江之水流滔滔
저 물이 흐르는 한 혼은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를 직감한 최경회는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갔다. 장마비가 내리는 칠흙같은 밤 피맺힌 목소리로 서사시를 읊은 후 북향4배하고 강물에 뛰어 들었다.

 

201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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