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산시

경산...하양 국학연구소

임병기(선과) 2011. 12. 3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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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우리카페에 올라온 최재운 교장선생님의 아래의 '무학산 가을비'에 성엿집. 가묘, 불상, 석탑이 있다는 내용을 읽고 귀가도중에 찾았다. 국학연구소는 우리가 익히 주지하고 있는 환성사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네비로 방문시에는 하양 하주초교를 지나 환성사 방향 5분여 지나면 오르막이 끝나고 작은 삼거리가 보인다. 좌측은 환성사 가는 포장길이며 가운데와 우측은 비포정길이며 가운데 길 방향 펜스에 경산상여, 국학연구소 작은 팻말이 보인다. 이방향으로 끝까지 진입하면 연구소에 다다른다.

 

한가위를 눈앞에 둔 주말에 하양 무학산으로 향했다. 정상 부근에 위치한 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에서 9월 정기 모임이 있었다. 장소가 특별했고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이 다양했으며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 찾지 못한 사이 연구소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상엿집을 중심으로 가묘(家廟), 불상, 석탑 등 다양하게 전시되어있는 자료들이 주인을 잘 만나 향기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삼층탑

 

국학연구소?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체이지 않은가? 자료검색 찾은 법인 취지문을 통하여 연구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무학산에 있는 연구소는 대구 지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육계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주회원인 듯하다..

 

무릇 학문이란 진리추구의 효율적 방편이요 문명진화의 생산적 장치입니다. 학문이 없이는 진리의 열매를 영글게 할 수 없고 학문을 외면하고는 문명진화의 법칙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학문 역시 우리 한민족의 가치구현과 문명진화에 중요한견인차가 되는 것으로, 국학의 필요성도 이러한 인식 위에서 대두된다 하겠습니다. 까닭에 국학이란 우리의 중심과 외향을 균형잡아주는 학문으로써, 사상적 정체성과 공간적 차별성 그리고 시간적 연속성을 토대로, 우리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개방적 학풍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누천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와, 홍익인간을 통한 현묘지도(玄妙之道)의 철학적 전통, 그리고 인류 문화의 자산이라 할 한글창제는, 우리 국학의 중요한 근간이요 고귀한 자취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국학적 토대 위에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켜 왔음은 물론, 외래문화와의 발전적 습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외래학풍의 지나친 유행 속에서 우리의 학풍을 소홀히 하고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역사가 있어도 근원을 밝히지 못하고 철학이 있어도 살아있는 가치로 승화시키지못했습니다. 또한 언어가 있어도 그 고귀함을 자각치 못함으로써, '우리의 잃어 버린 학문적 현실'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더욱이 세계는 국경과 민족을 넘어 지역적 통합이라는 당위적 명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학문 또한 보편적 진리 구현이라는 구실 아래, 중심 없는 개방 일변도로 치달아온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구심이 없는 원심활동이 급기야 무의미한 운동으로 전락함과 마찬가지로, '나'를 외면한 '우리'만의 지향은 '진정한 우리'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학문 역시 나를 올바로 세우는 학풍을 외면하고서는 우리로 만날 수 있는 학풍을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즉 국학의 올바른 정립 없이는 진정한 세계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세계학을 이루기 위해 국학의 연구를 체계화하고자 합니다. 특히 국학의 뿌리이자 줄기며 열매라 할 수 있는 역사와 철학, 그리고 언어의 궁구(窮究)를 위해 연구의 심층적 행보를 내딛을 것입니다.

 

나의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고는 세계사의 흐름을 정관(正觀)할 수 없고, 나의 철학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세계사의 무대에서 주인행세를 못하며, 나의 언어를 올바로 가꾸지 못한다면 세계화의 조류에서 생각 없는 앵무새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단은 결실되었다. 초층 탑신과 1,2층 옥개석이 1기 탑의 동일 부재로 보인다.

 

 

3,4층 옥개석은 아래 부재와 재질이 달라 보인다.

 

 

3,4층 옥개석을 제외한 부재는 석탑 부재가 아니며, 옥개석 하나가 결실된 오층탑 보다는 2기 석탑 부재 조합으로 판단된다.

 

 

하반신이 결실되고 광배와 한 돌에 돋을 새김된 석불입상이다.

 

 

어디에 모셨던 불상일까?

 

경산 상여집

 

경산 상엿집은 본래 영천시 자천리에 있던 것을 조원경씨가 매입하여 현 위치에 이건한 것으로 건립당시 상량문이 남아 있어 1891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 상엿집이 흙벽과 평지 바닥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경산 상엿집은 세 칸 규모의 판벽과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건축학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이 상엿집 속에는 1891년 상엿집 건립 전후시기의 상엿계 운영에 관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문서와 마을 공동체의 풍속, 촌락의 사회경제 활동 등 당시 마을공동체의 현황을 엿볼 수 있는 동중문서(洞中文書)들이 함께 발견됨에 따라 민속학적·학술적 가치 등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

 

 

묘소 주위에 있었던 문인석과 미륵불. 중앙은 기자신앙의 대상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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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하양시내가 아련하다.

 

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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