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산시

경산...불굴사

임병기(선과) 2013. 1. 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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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사진이다. 문화재 설명은 전통사찰관광정보와 문화재청 홈에서 발췌 정리하였다. 2007년 답사기와 2003년 글을 첨부하였으니 참고 하여 비교해보기 바란다.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절 위의 암벽에 신비스러운 석굴이 있는데 이 석굴은 정 창건 이전에 원효대사가 득도한 석굴이라 해서 원효암(元曉庵), 또는 불암(佛庵)이라고도 불린다. 이 석굴은 또한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 성취 기도처로도 알려져 있다. 아마도 ‘불굴사’라는 사명이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후 화광당 한옥희대사가 주석 시 옥천암, 천성암, 청룡암 등 산내 12군데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중기만 하더라도 500동의 와가와 12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스님과 신도들의 공양미를 한 대사찰이라고 전해온다. 현재 암자 10개소와 물레방아 호박, 맷돌들이 발견되어 전하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에 의해 법당과 요사가 불타버린 뒤 여러 차례 중창 불사를 펼쳤으나 중수 관계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 경종 3년(1723) 중창 후 영조 12년(1736) 병진 대홍수로 대형 산사태가 발생해 사찰이 거의 대파돼 쇠락하고 말았다. 

 

불굴사의 이러한 쇠락에 관련하여 인근 강학리에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본래 불굴사는 굉장히 큰 절이었는데 절이 있는 계곡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골짜기 마다 절이 있었고 밭이 곳곳에 있었다. 그때는 은해사도 불굴사의 말사였다. 그러나 불교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스님들은 일반 백성들에도 멸시를 받앗다. 지나가는 과객들도 절에 와서 괜히 스님을 업신여기고 밥 해달라, 뭐 해달라 하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덮어놓고 스님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불굴사는 이러한 과객들의 폐단이 깊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과객에게 항거할 수 없었다. 마침내 스님들은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마침 한 점잖은 과객이 이 절에 들르자 스님들은 이 같은 폐단을 털어놓고 절에 손님이 적게 오는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과객은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하나 있는데 그 거북의 눈을 빼버리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절의 스님들은 과객들 때문에 워낙 지쳐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듣고 좋아하며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 그러자 청전 하늘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쏟아지더니 이 산 저 산 다 떠내려와서 절이고 암자고 다 묻혀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러다 보니 이 절을 따르던 은해사 암자가 오히려 큰 절이 되고 불굴사는 결국 은해사의 부속 암자가 돼버렸다. 

 

이후 불굴사는 송광사의 어느 노스님의 현몽에 의해 이 곳에 지금의 약사여래부처님이 묻혀있음을 알고 다시 중건하기 시작한다. 또 철종 11년(1860)에는 유혜(有惠),쾌옥(快玉) 두 스님이 불굴사를 중창했으며, 은해사의 경파 백현(鏡波 伯鉉)스님이 1939년 다시 중창했다. 1988년에는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그 자리에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사전

 

약사보전 앞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등 1기가 있다. 원래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네모난 기단 위에 8엽의 복련을 넣었고 그 위로 3단의 괴임을 두어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고 화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팔각 옥개석은 낙수면이 평평하고 얇으며 합각선이 뚜렷하고 전각에 반전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 상륜부에는 보주가 보인다.

 

 

 

 

 

1736년 대홍수로 사찰전각이 무너져 매몰된 것을 송광사의 노스님의 현몽으로 인해 발굴하게 된 불굴사 석조약사여래입상이다. 정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약사보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부처님은 정면이 아닌 우측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자연석 화강암 위에 받침대를 세우고 그 위에 약사여래를 조각해 모셔 놓았다. 상호와 신체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의 길어서 발등까지 덮었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도록 허리춤에 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다. 혹자는 이 약합을 보주로 보아 미륵입상으로 보기도 한다. 연화대좌는 둥근 원형으로 하단에 복련으로 장식되어 있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목 아래쪽과 머리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상호는 타원형의 얼굴로 귀가 크고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 지었다. 얼굴의 입, 눈, 코,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약사여래부처님은 팔공산의 약사신앙과 더불어 영험 있기로 유명하다. 전설에는 갓바위 부처님은 남자이고 불굴사의 약사불은 여자로 일컫기도 하는데 팔공산이 양(陽)이면 안산인 불굴사의 산세는 음(陰)이기 때문이다. 약사여래입상은 화강석으로 자연상태의 예측불이라고 하여 얼굴 부분에 땀이 나고 온몸이 젖으면 태풍이나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산 아래 음양리가 있는데 갓바위 쪽의 마을을 양지리라 하고 불굴사 쪽의 마을을 음지리라 하니 이는 음양조화가 원만한 지형이라 할 수 있겠다. 특이한 것은 불굴사 주변 일대에 우기가 있으면 불상의 얼굴부분에 땀이 나고, 특히 큰 비가 오기 전에는 불상의 온몸이 흠뻑 젖는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거나 하면 반드시 석불의 몸에 습기가 가득 찬다고 한다

 

적멸보궁

 

괘불대

적멸보궁안에 모셔진 사리탑

 

 

독성, 산령각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보물 제429호 불굴사 3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 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 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다.

 

  

 

 

201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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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불굴사 홍주암에서 내려다본 대포 고속도로

 

경산시 와촌면 불굴사 길지 않는 하루 여정의 종점이다. 제법 긴 산길을 올라 불굴사에 오르니 중국산 멍보살이 아는 체를 한다. 근래에 갓바위 부처의 마누라 약사여래불로 회자되는 불상으로 인해 신도들의 발길이 잦은 절집이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

 

불굴사는 원효스님이 창건했지만 김유신이 17세 화랑시절 삼국통일에 대한 원을 간절히 세워 신인(神人)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탑위치로 미루어 주전각 자리로 추측되는 터에 최근에 적멸보궁을 중건하여 진신사리 부도를 모신 괴상틱한 가람이지만 한글 주련은 앞으로 중창불사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약사전 약사여래입상

 

1736년 대홍수로 매몰된 것을 송광사 노스님의 현몽으로 인해 환생한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전각문을 열면 측면이 보인다. 좌향을 바꿔가면서 전각을 중수한 것 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용트림하는 석조기둥은 무엇인지...

 

조성시기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입상은 복련이 고운 연화대좌에 서있으며 타원형 얼굴로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다소 굵어보이는 육계, 소발, 삼도를 표현하였고, 법의는 길어 발등까지 덮었다. 훼손된 이목구비는 다시 새겼다고 한다.오른손은 시무외인 수인이며, 왼손에는 약합을 올려 놓았다.

갓바위 부처님은 남자이고 불굴사의 약사불은 마누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아랫동네 갓바위 부처가 있는 방향 마을은 양지리라하며 반대편 불굴사 쪽은 음양리라하여 음양을 고려하여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겠다.

전설에 의하면 불굴사 주변 일대에 우기가 있으면 불상의 얼굴부분에 땀이 나고, 특히 큰 비가 오기 전에는 불상의 온몸이 흠뻑 젖는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거나 하면 반드시 석불의 몸에 습기가 가득 찬다고 하니 신비롭기 그지 없다.


석등

 

약사전 기둥에는 용이  용트림하고 있다. 석등은 기단 위에 복련을 새기고  간주석에는 괴임이 보인다. 팔각 화사석은 마모가 심하고 화창은 장식없이 평이하다.  상륜부는 멸실되었고 배례석이 남아있다. 약사전 전각 때문에 약사여래입상은 물론 석등마져 가치가 바래지는 것은 아닌지?


맷돌부재

 

번창했던 영화를 알려주는 맷돌 부재


삼층탑

 

3층석탑은 2기단이며 하기단 갑석은 두껍다. 상기단에는 우주와 버팀기둥을 양각하였다.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이며 우주를 새겼다. 그외에도 옥개석 받침이 4개로 줄어들었고 추녀의 반전이 심한 것으로 미루어 신라하대로 판단되며 상륜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적멸보궁 석축하단 괘불지주


산령각,독성각

원효굴의 마애불

 

원효대사가 수도하고 김유신 장군도 만났을 밀적금강, 나라연금강이다. 이곳에서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인 금동여래불을 천년동안 지키고 계신 금강역사상이며,  마애석불이 위치한 자리에서 금동여래불이 봉안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약수터

 

원효굴에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약수터가 있다. 


독성각
 

불굴사 공양간을 지나 산을 올라 원효굴을 통과하면 전망좋은 자리에 독성각 있다. 불굴사 홍주암의 유일한 전각이며 홍주암은 음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 불굴사에서 가장 이른 시간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불굴사에 독성각이 있건만 왜 독성각이라 했을까? 전각를 지은 분은 천태산에서 나홀로 득도한 나반존자처럼 홀로 깨달음의 경지에 들고자하는 바램이었을까? 

 

깨달음의 길은 멀지만 우리 같은 중생에게는 배고픔은 가깝고 현실이다. 답사의 마무리를 경내 찻집에서 수재비 한 그릇으로 님들과의 정을 나누었다. 또다시 만남을 기약하면서...

 

200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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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제 엄마가 챙겨준 귤, 과자, 음료수를 연신 입에 넣어주던 아들도 지친 듯 잠이 들었지만 불굴사 올라가는 산길은 굽이가 심해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멀리 청통(?) 들판이 내려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한 불굴사는 김유신과, 원효 대사가 주석한 굴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반인들은 스쳐가기 쉬운 절집이며 최근에야 갓바위 부처의 마누라로 대접받는 석조약사여래입상으로 참배객의 발길이 잦은 가람이다. 

갓바위의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최근에 불사한 약사보전 전각의 현란함 아니 경박함은 도가 지나친 듯하다. 임금이 계신 궁궐도 아니건만 기둥에는 용이 승천하려는 듯 거대한 몸을 감고 있어 오히려 약사여래 입상이 왜소해 보인다.

 

조선조 영조 시절 대홍수가 일어난 후 땅속에 있던 약사여래불이 마침 이곳에 들린 송광사의 노장스님에게 발견된 약사여래입상은 자연 암반 위에 통견,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갓바위 부처와 마주보고 서있다. 갓바위부처와 불굴사 사이의 동네의 지명이 음양동으로 이로 인해 부부 약사불로 불리어지며 실제 미술사학자들에 의하면 두 부처의 조성시기를 동시대로 보고있어 부부 약사여래라는 설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내의 삼층석탑과 석등도 신라의 전형에서 략화된 신라하대의 양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동시대에 조성된 부부 약사불로 나도 믿고 싶다. 삼층석탑 뒤 적멸보궁 역시 최근의 불사로 이룬 전각으로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는 대신 벽면을 오픈하여 뒷쪽에 부도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나 (은진미륵은 미륵전을 터놓아 미륵불을 참배하도록 되어 있지만...) 불굴사는 부도탑을 전각에 모셔 놓았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래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념 한 자락 삼키며 내 좋아하는 환성사 지붕이 사라진 일주문 돌기둥이 보고접어 아들놈의 손을 잡고 절집을 내려왔다. 

                                                                    2003.02월 아들과 둘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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