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산시

[스크랩] 경산...갓바위 선본사

임병기(선과) 2008. 6. 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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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본사가 의성 고운사인줄 모르듯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가 경산 선본사 사역임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팔공산 갓바위 행정구역은 경산시 와촌면으로 동화사 처럼 신라 소지왕 시절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선본사는 대구 동화사 넘어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다.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영험한 갓바위 부처님의 공덕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보시를 받는 절이며 그로인해 어느 교구에도 소속되지 않은 조계종 직할사찰로 보시금은 조계종으로 보내진다.특히나 갓바위부처가 바라보는 지역 경남, 부산의 보살님들의 발길이 일년내내 끊어지지 않는 성지이지만 정작 선본사는 님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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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본사는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선본사가 있는 구역, 갓바위 직전 용왕각,산신각, 칠성각이 있는 중단구역, 그리고 갓바위 부처가 있는 상단 구역이다. 하단구역 본절의 선정루. 일주문도 없는 선본사 루대로 2층에는 범종을 비롯 사물이 걸려있고 누하는 사천왕 벽화가 있는 천왕문이다. 동방지국천이 비파를 든 일반적인 도상이지만 북방 다문천을 비사문천으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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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본사 극락전.다소 높은 축대위에 최근에 중건된 전각으로 3*3칸 팔작지붕이다. 벽에는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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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을 주불로 협시보살은 지장과 관음이 협시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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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에는 산신과 나반존자가 동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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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루 옆에 놓여진 석조 대좌. 불상은 떠났어도 대좌는 팔각이며 앙련도 보인다. 통일신라 갓바위부처와 동시대에 조성된 불상대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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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의 석등부재. 오른쪽 부재는 지대석과 복련을 한돌에 새겼다. 대좌만 남은 불상을 금당에 모시고 불을 밝혔을 석등이었다면 역시 통일신라 석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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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선정루에서 아무리 살펴도 석탑이 보이지 않아 종무소에 이야기 했더니 보살님도 안보인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급기야 다른 분이 나오셔서 산허리에 보이는 석탑을 가르킨다. 내기억속에는 왜 석탑이 선정루 정면 밭가운데에 있다고 각인되어 있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다. 

 

석탑은 갓바위부처님 쪽을 바라보고 우측 산허리에 자리했다. 왜 석탑이 단독으로 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갓바위 부처를 조성한 의현스님 사리탑으로 말하기도 하며 풍수적 목적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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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은 멸실되고 3층 옥개석은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지만 신라전성기의 모습을 간직한 석탑이다. 무너져 있던 부재를 1979년에 복원하였으며 1층 탑신에는 절단된 도굴(?)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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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단에는 탱주 2개와  우주가 각각 1개 새겨져 있다.  옥개석 층급은 5단, 탑신 괴임은 2단으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 전형양식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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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위치에 대해서 아직도 설이 분분하지만, 답사 매니아들이 아니고선 좀처럼 찾기 힘든 아니 찾지 않을 석탑이다. 팔공산 주위에서도 시대가 앞서며 통일신라 전형을 많이 간직한 탑이다.갓바위 참배로 입구에 석탑 오르는 길 산길 위치 안내 입간판이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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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 앞의 석조부재. 석등 대좌와 부도 옥개석으로 보인다.

 



갓바위 부처 / 관봉 석조여래좌상...문화재청

 

선본사 상단구역.대구 거주하는 사람이면 여러번 뵈었을 것이다 대구 방향에서 올라가면 소시적에는 4~50분에 주파했는데 요즈음 1시간 20분은 족히 소요된다. 선본사 방향으로 오르면 3~40분이면 충분할 것 이다. 오늘날 팔공산이 약사여래 성지로 부각되는 그 최정점에 있는 갓바위 부처다. 한국전통사찰에서 자료를 옮겨온다.

 

"관봉석조여래좌상은 팔공산의 남쪽 봉우리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좌상으로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른다. 관봉이 곧 우리말로 '갓바위'이므로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또 머리에 마치 갓같은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기에 그렇게도 부른다. 관봉은 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과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봉우리로서 해발 850m의 고봉(高峰)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팔공산의 서남쪽이 모두 두루 조망된다.

 

이 부처님은 묘하게도 오뚝 솟은 바위로 만든 것인데, 몸 뿐만 아니라 대좌도 역시 한 돌로 되어 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없지만 뒤쪽에 마치 병풍을 친 듯 기다랗게 바위가 둘러져 있어 혹시 이 자연 바위를 광배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그 위로 두께 15cm정도의 흡사 갓모양을 한 얇은 바위가 얹혀졌다. 바위 아랫면에는 육계에 맞닿는 곳에 둥근 구멍을 파서 육계에 맞도록 하였으며, 윗면 가운데는 같은 식의 둥근 구명을 도드라지게 하고 그 주위에 화판(花瓣)을 조각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인공적 조각임을 느끼게 한다.

 

얼굴은 양쪽 볼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등 비교적 둥글고 풍만한 편이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 대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화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다. 이마 한 가운데는 백호(白毫)가 둥글게 솟았고, 오똑한 코 아래의 인중도 두드러지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양쪽 어깨에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두 어깨는 반듯하고 넓어 당당한 신체와 잘 어울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그것과 양식상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왼쪽 발 부근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약합(藥盒)을 올려놓았다.

 

불상에 표현된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려 있으며, 불의의 옷주름을 표현한 선각(線刻)이 매우 유려하다. 그리고 가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으로 되어 있다.

대좌는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 윗부분에는 길게 입은 옷의 끝자락이 엎고 있는데 이같은 대좌 형식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이것은 팔공산 부근에 있는 군위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형식과도 유사하다.

이 갓바위 부처님은 원광법사의 수제자인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38년(선덕왕 7)에 조성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8-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현재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의 학술상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 이름에서 굳이 약사불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이 부처님의 명칭에 대해 미륵불, 아미타불 등 이론(異論)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왼손에 보면 약합이 있는 것이 뚜렷하다. 또 옛날부터 이 부처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약사여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이 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어쨌든 손위의 약합이 분명한 이상 앞으로는 약사여래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갓바위부처님의 특이한 것은 모자인데, 갓바위 부처 머리에는 두께 15cm, 지름 180cm의 판석이 올려져 있어 마치 갓을 쓴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갓은 몸체와 다른 돌로 육계와 홈을 파서 따로 올렸다. 그 갓을 위에서 보면 꼭지부분이 튀어나오고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갓의 아래 부분에도 군데군데 연꽃 무늬가 남아 있다. 현재 두 군데가 깨어져 있는 갓의 모양은 원래는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연꽃 무늬를 새겨 넣은 팔각형이었다고 조사되었다.

 

갓바위부처님은 8세기쯤 조성되었는데, 석등의 옥개석을 이용하여 고려시대에 이 바위에 갓을 씌었다고 추정된다. 그 갓 덕분에 얼굴의 표현이 지금까지 자세히 남아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산봉우리에서 비를 맞고 있는 부처님이 가엾어 모자를 씌운 사람들의 마음도 정겹다. 그리하여 갓바위부처님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모자를 얻어쓰고 언젠가부터는 옆에 불전도 있었던 부처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약사신앙의 상징인 갓바위부처님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62년 동아일보에서 최초로 보도한 ‘또 하나의 약사여래상 팔공산 벼랑 끝에 외로운 좌선 천년’이라는 기사로 인해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2의 석굴암'과는 비교가 안되는 웅대한 규모의 좌상이 대구에서 동쪽으로 50리 거리 팔공산 주봉 기암절벽 위에 솟아 있다. 경산군 와촌면 진인동에서 팔공산 주봉으로 올라가기 약 2시간 남짓한 해발 800m 산위 (주봉 1192m) 자연 암석이 놓인채 그대로 조각된 약사 여래불 좌상이 병풍돌을 의지하고 동남향으로 진좌하고 있는데, 그 규모는 뒤의 병풍돌의 높이가 약7m, 폭이 50cm, 두계 2m50cm, 불상자체의 높이(전장)가 6m, 폭이 8m50cm, 얼굴 길이가 80cm, 위에 쓰고 있는 갓이 1m 80cm의 지름이고 손이 팔목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80cm, 손가락 끝까지 80cm, 손가락 길이만 35cm. 좌상 둘레는 깎아지른 단애이며 좌향 왼쪽으로 멀리 영천벌을 오른쪽으로 대구 일대를 앞으로는 경산, 자인 방면을 굽어볼 수 있다.

 

이 불상은 대구 시민 중 일부 소수의 등산가와 간혹 치성 드리러 간 몇몇 민간인 사이에 알려졌을 뿐 세상에 알려진 일이 없었다. 이 좌상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산기슭에 있는 선본암 전의 약사암(藥師庵)의 스님, 북계사(北溪寺)의 구한송(具寒松) 스님 등의 구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효공왕의 대비가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였는데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의 효성이 지극하니 목탁소리를 따라가면 영약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현몽을 얻어 곧 신하들로 하여금 목탁소리 나는 곳을 찾게 하였더니 목탁소리가 멎은 곳은 천야만야한 바위 앞, 그 앞에 맑은 샘이 솟아 흘러 그 물을 담아다 대비에게 드리자 완쾌하였으며 임금은 그 기쁨과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그 약물터에 약사 여래불상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중략)

 

이 불상에 관해 신라, 가야 문화를 연구하는 청구대의 서경보 교수는 "좌대의 옷무늬는 퍽 희귀한 것이고, 군위에 있는 새로운 석굴의 불상이 퍽 소박한 수법임에 비해 상당히 정교한 폼이라든지 그 규모가 웅대한 것 등 훌륭한 예술품이다"라고 말하였다. 현재 갓바위 부처님 앞에는 약 80평 가량 널찍하게 터가 닦였고, 바닥에 돌이 깔리고 주위에는 철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또 그와 함께 선본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좀 더 넓혀지고 계단과 철제 난간이 많이 보완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한결 기도하기 편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위 위 부처님 바로 앞에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만든 단(壇)과 돌거북, 그리고 양쪽에 석등을 놓았다.

 

우리가 갓바위부처님의 경이로움을 찬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장소에 부처님를 만들 돌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은 아니오, 자연 경관에 수려하게 나온 바위 돌을 이용해 부처를 세운 점이다. 이러한 불상을 세우려면 지금과 같이 기계를 사용하면서 10명이 달라 들어 작업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터, 당대에는 아마 수년에 걸친 대공사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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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본사에서 바라본 갓바위 부처님 계신 정상


2008.02.1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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