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거주하는 최성호 소장님의 대구 한옥 답사에 동행했다. 육신사는 하빈면 묘골에 위치하며 사육신 박팽년 후손들이 종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화원의 대구교도소가 이 곳으로 이전 추진중이어서 주민들의 반대 현수막이 어지롭게 걸려 있다. 육신사는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성삼문을 모신 사당으로 1971년 기초공사를 하여 1981년 완공 하였다. 현판은 낯이 익은 우에서 가로로 쓰여진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절의묘
절의묘 현판은 육신사 정문 안쪽에 걸려 있다. 박팽년 선생의 손자인 박일산이 박팽년 절의를 기리며 처음에는 절의묘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손이 박팽년 선생의 기일에 사육신이 함께 대문을 들어서는 꿈을 꾼 후부터 다른 분의 제사도 모시게 되었다. 즉 후손이 없는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절의묘.하빈사. 하빈사는 하빈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재건하였다. 현재의 배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단장하여 육신사로 조성된 듯하다
사육신을 상징하는 육각탑. 그들의 행적이 실려 있다.
단종 복위 실패후 사육신은 모두 처형을 당하고 부녀자도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지만 박팽년 후손은 둘째며느리 성주 이씨와 여종의 기지로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둘째며느리는 시조부, 박팽년과 형제들, 남편과 형제들이 모두 처형되고 멸문지화를 입은 후 대구에서 관비 생활을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임신중이어서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노비로 삼으라는 어명을 받았다. 얼마 뒤 이들을 출산을 하여 소식이 관으로 들어가면 아기는 바로 죽을 운명이었다. 이때 며느리 이씨의 여종도 함께 따라와 있었는데 마침 그녀도 임신 중이었으며 딸을 풀산하여 바꾸어 기르게 되어 여종의 아들이 된 박팽년의 손자는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묘골마을로 숨어들어 외손자를 '박비'라는 아명으로 비밀리에 키우게 된다. 아이가 16세가 되어 자수하여 성종의 사면을 받고 낙향하여 외갓집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종택을 짓고 정착하게 된다. 또한 육신사의 전신인 절의묘(節義廟),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이름도 박일산(朴壹珊)으로 개명하였다.
태고정
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 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건물로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한석봉의 글씨?
옳은 것은 하나? 아마도 단종 임금만이 군주이고 세조는 임금으로 모시지 않은 절의를 의미하는 듯하다 글씨는 비해당 낙관으로 미루어 안평대군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 편년은 맞지 않다고 하지만 숨은 내력은 누가 알겠는가?
태고정 서쪽측면
태고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집이다. 서쪽으로 8자 4간통의 온돌방·곁방·주방 등이 배치되어 있다. 평면·개구·개방부 등은 일반 별당 형태와 같으나,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둔 것이 특징이다.
서쪽은 부섭지붕을 내었고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대청 쪽은 겹처마 팔작지붕
동쪽으로 9자 4간통의 대청이,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대청은 장귀틀과 동귀틀로 짜고 마루널을 끼운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부분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기둥머리에는 굽면이 비스듬히 끊기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에서 끝이 날카로운 쇠서 하나를 내어 대들보머리를 받쳤다.
대청의 연등천장
종량 위에는 판대공에 첨차를 두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측면 가운데 기둥머리에서 아름다운 우미량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고 있다.
태고정 관리사. 최성호 소장님은 이 건물에 끌린듯
도곡재 솟을문
도곡재는대사성을 지낸 박팽년의 후손 박문헌이 살림집으로 건립하였으나, 후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가져와 도곡재로 이름하였다.
도곡재 솟을문의 엄나무. 벽사의 상징이다.
사랑채와 문간채
낮은 기단위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납도리의 팔작집붕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인데, 후대에 와서 헛간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각처럼 꾸몄다. 대청 위로 역시 부섭지붕을 걸었다.
문간채
안채
안채 측면. 아궁이 위에 다락방이 있으며 부섭지붕을 걸고 바람막이(?)벽을 쌓았다.
안채 부엌
안채 후원
헛간채가 2층이다.
몇년만에 묘골이 너무도 변했다. 마을이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지만 우리 한옥의 맛이 느껴지지 않고 영화셑트장 분위기다. 개발이 복원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꼭 이래야만 했는지. 2011.08.13. 태고정 건축이야기는 문화재청 홈을 참조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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