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방 가옥 답사기는 몇 편 올린듯하다. 이 글은 예전에 문화재청 답사기 공모에에 응모한 글이며 2011.08.13일 최성호 소장님과 다녀온 후 사진 몇장 추가하여 수정했다.
달성 조길방 가옥...중요민속자료 제200호
누구에게나 늦가을은 설레고 아련한 옛 추억을 반추하는 계절이지만,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들에게 민속촌, 영화 촬영장에서 볼 수 있는 초가집은 낯설고 꽃단장을 하여 정감이 가지 않는다. 그런 어린 시절 향수를 달래 줄 대구근교의 초가집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조길방 가옥이다. 소박한 모습의 가옥은 꾸미지 않았어도 자연스런 풍경이며, 바라만 보아도 정겨운 고향 옛이야기가 뜨락 가득한 옛집이다.
중요민속자료 200호.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의 조길방 가옥은 지금은 접근이 용이하지만, 예전에는 첩첩산중 산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옛집을 찾아 가는 나의 몸과 마음은 타성에 젖어 무미건조하고, 반복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베였지만 가창 댐을 돌고 도는 길 초입부터 청량한 바람의 촉감과 울긋불긋 단장한 만산홍엽의 가을 잔치에 주인공이 되어 고향 마을 배꼽마당을 뛰어노는 어린아이가 된듯하다.
개울과 나란히 어깨동무하며 청도군 각북면 용천사, 봉길리 석탑으로 향하는 한적한 지방도로가 지칠 느낌이 들 때쯤 길가에 서있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 길을 따라 차창을 열고 고향노래 흥얼거리며 산길을 재촉하면 산골 마을 수호신이며, 민초들의 오랜 친구인 정대리 마을의 성황당과 당산나무가 팔을 벌려 손님을 맞이한다.
성황당
전통 취락구조의 외호막이인 마을 숲(洞藪)과 더불어 성황당은 마을 입구에 조성된 신성구역이며 일반적으로 돌무더기와 당산나무, 장승으로 조성된다.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과, 벽사,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기도처이며, 민간신앙이 꽃 핀 성지였다. 또한 척박한 환경, 고된 일상에 지쳐 삶을 영위하는 민초들의 안식처이며 행복한 사후 세계를 기원하는 대화채널이었다.
조선일보에 칼럼을 오랫동안 연재한 이규태님은 돌무더기를 경계와 통과의례, 유사시 전투 자원으로 기능을 광의로 해석하였지만 농경사회가 모태인 산골마을에서는 풍요와 다산 및 민간종교적인 상징성이 농후하리라 본다. 돌무더기와 당산나무에는 신의세계를 표현하여 왼새끼로 꼰 금줄을 두르고, 어둠에서 발호하는 악한 무리를 축출하는 상징으로 하얀 헝겊 또는 오색 천조각을 걸었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 전후에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경비를 추렴하여 제수를 마련하고, 한 해 동안 상을 당하지 않고 좋은 일을 많이 겪은 주민을 제주로 추대하여 당산제를 모신다. 동제라고도 칭하는 제의를 정월대보름 전후에 받드는 까닭은 농경사회에서는 땅은 음의 기운이며 그 기운이 가장 강한 날이 정월 대보름이기 때문이다. 즉 풍요를 기원하는 민초들의 작은 바람인 것이다.
오랜 민속이 경제개발과 새마을 운동의 전개, 미신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히 훼손되었지만 근간에 일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사라진 전통 문화 복원을 위해 주력하고 있다. 그에 만족하지 않고 예산 편성 및 보급과 시연을 위해 동분서주 활동을 전개하여, 이제는 지역축제에 메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은 여간 고맙고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전통 민속과 풍속을 살리는 것은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정신세계의 원형을 되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황당을 거쳐 산마을로 향하는 길. 문득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이 스쳐간다. 서정성, 향토색 짙은 산골의 숯쟁이 현보와 철부지 아내 순이의 잔잔한 일상과 그들을 둘러싼 광부 칠성이와 산감 김주사의 반목과 질시가 파장을 일으키며 분란을 거듭하는 이야기다. 긴 방황 끝에귀가한 순이는 감옥살이에서 돌아온 현보의 인기척을 감지하고 집 앞의 느티나무아래 성황님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리는 단순한 줄거리의 토속적인 소설이지만, 요즈음의 드라마가 감각적인 대사와 부도덕한 논리 전개, 모럴 해저드가 시청률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여과장치 없이 마구잡이로 전파를 타는 현실에 비하면 인간적인 소설 아닌가?
당산나무 금줄과 성황당
정대1리 조길방 가옥(지정당시 문화재 이름으로 현재 소유주 명으로 변경되어야 한다)이 있는 한덤 마을은 대여섯 집이 옹기종기 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산을 등지고 작은 개울이 눈 앞에 흐르는 산골이지만 주거 환경이 좁고 농지가 협소하여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으로는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정대(鼎垈)라는 동의 유래도 마을을 둘러싼 삼면 산봉우리가 솥발 모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은 십승지의 한 곳은 아니지만 오히려 전란을 피하기 용이한 풍수지리 형국에 어울릴 듯하다. 실제로 가옥은 18세기에 가문의 화를 피해 소유주의 선조 조광국이 이주하여 왔다고 한다.
짧은 골목길에서 고샅으로 이어지는 가옥은 전형적인 산골 취락구조지만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입구에 최근 조성한 바깥사랑채(?) 규모로 보면 처음에는 산촌에 널리 조성된 바자울이 정겨운 사립문 보다는 대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금은 사랑채를 우회하여 안마당으로 출입하지만 안마당을 등지고 앉은 사랑채 좌향으로 판단하건데 예전에는 대문을 넘어 사랑마당을 지나 안채로 향하는 중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안채..2011.08.13
고택은 옛날에 거주하였던 사람의 기준으로 살펴보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측면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만, 나 역시도 오늘의 시각으로 접근하며 이해하는데 익숙하여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랑채를 우회하면 안채, 아래채는 안마당을 향하였고 사랑채는 등지었지만 ㄷ자(字) 배치의 가옥이다. 넓지 않은 터에 안마당은 큰 크기에 속하며, 양택 입지의 전형인 남향은 아니지만 주어진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배치된 안채는 서향하고 있다.
안채
안채는 근처에서 수습한 막돌을 허튼층으로 다소 높게 쌓았다. 북부 산간지방 가옥은 벽난로의 일종인 코콜을 조명과 난방 목적으로 설치하고, 보온을 위해 겹집 구조가 주류를 이루지만 조길방 가옥은 홑집이며 코콜은 보이지 않았다. 안채는 초가집 규모로는 아주 큰 크기로 중앙에 두 칸 마루, 우측에 안방과 부엌, 좌측에 건넌방을 둔 구조이다. 창살은 일반 민가에 가장 흔한 띠살문이며, 막돌 주초위에 그랭이가 뚜렷하지 않은 방형 기둥을 세웠지만 마루 중심기둥은 목리가 드러난 두리기둥이다.
2011.08.13
조길방 가옥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는 안채 두 칸의 대청도 흥미로운 구조이다. 가난한 살림집의 대명사인 초가삼간에서는 대청 설치는 엄두도 내지 못하며 봉당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조길방 가옥은 입향조 이후 동족 부락이 형성되어 제사에 많은 친척이 참석하려면 큰 제례공간이 필요하여 두 칸 대청을 조성했을 것이다. 실제로 별도로 사당이 마련된 사대부집도 대청은 하절기에 시원한 자연 냉방을 공급하는 장소지만, 제향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사랑채
가옥구조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부재는 싸리나무로 조성한 두리기둥과 칡으로 가구한 들보이다. 기둥과 들보 재료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튼실하게 조성된 구조로 가늠하면 좋을 것이다. 대들보 상량문의 기록으로 18세기 후반 조성됨을 알 수 있으며 눈길을 끄는 것은 안방에서 마당을 향해 난 외여닫이 살창이다. 출입 용도 보다는 통풍과 햇빛을 고려한 설치지만 눈꼽채기창 기능도 없진 않았겠다.
2011.08.13
쌍여닫이문과 살창이 달린 부엌은 음양의 조화를 위해 서향집에서는 부엌을 북쪽에 두는 양택 풍수지리 이론에 부합된다. 안채 기단 아래 높이에 좌측은 사랑채로 안마당을 등진 두 칸 방, 마당을 향한 한 칸의 다용도 도장을 두고, 방을 등진 벽 쪽으로 안채 출입을 위한 외여닫이문을 내고 쪽마루를 두었다. 아래채는 외양간, 방, 곳간이 일자(一字)형이며 예전 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2011.08.13
전체적으로 섭렵해 보았지만 톺아보면 조길방 가옥 구조와 목재부재는 산촌의 일반 민가의 배치와 다른 특징이 여럿 보인다. 조선초기에는 궁궐 부재로만 가능했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 질서가 붕괴된 시절에도 사대부 집안에서나 사용했던 두리기둥이 안채에 서 있고, 나름으로 부부유별의 내외 공간이 엄격하게 적용된 점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한덤 마을 입향조 조광국이 정삼품인 통정대부를 지냈고 후손들도 벼슬길에 오른 집안 내력을 알고 나면 수긍이 된다.
마을 앞산
고택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거주하시는 분들과의 대화이건만 부재중이다. 빈 초가집 마당에 새지붕을 이우기 위해 이엉을 엮을 목적으로 쌓아둔 볏짚을 바라보니 옛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예전에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에 들기 전 농가의 마지막 겨우살이 준비가 초가지붕 이우기였다. 지붕 이우는 날은 일찍부터 품앗이꾼의 아침밥 준비로 분주했으며, 마당가에는 술도가에서 배달된 통나무 말통술이 턱하니 자리 했었다.
이런 날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난 까닭은 새참으로 나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속살이 노란 고구마의 달짝지근한 맛과, 노릇노릇하게 구운 배추전의 고소한 유혹 때문에 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작업에 방해가 되는 강남 간 제비 가족의 쉼터이기도 했던 빨랫줄을 걷기위해 익숙한 동작으로 바지랑대를 철거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뜨락에 내려서서 수돗가에 어처구니가 멸실된 맷돌과 윤기를 잃은 장독대를 바라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잘생기고 반듯한 농촌 총각이 장가를 들지 못하는 세태와, 뒷동산 능선을 닮은 초가지붕의 유려한 곡선미를 지닌 조길방 가옥의 미래가 오버랩 되어 찹찹한 심정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추의 길지 않은 하루해는 어느듯 뉘엿뉘엿 갈 길을 재촉하여 카타르시스는 고사하고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마음은 분분하기 그지없다.
2008.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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