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올렸던 허접한 글을 삭제하고 문화재청 글을 가져왔다.
해인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왔다. 광해군 6년(1614)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1979년 10월에 해체․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부도전. 부도전 뒷쪽이 사명대사 부도(?)로 알려진 1기 석종형 부도가 있다.
석장비
우리카페에도 연재글을 가져왔던 서울신문 서동철 기자의 글을 보자.
아무리 명품 청자나 백자라도 금이 가거나 수리한 흔적이 있으면 골동품시장에서 쳐주는 값은 크게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온전했을 때보다 깨진 뒤 더욱 높은 값어치가 매겨지는 옛 사람의 자취도 없지는 않습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비가 그렇습니다.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친 뒤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 나타나지요. 예전에 해인사에서 홍제암에 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지만, 이제는 대형버스도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닦였습니다.
홍제암은 임진왜란 당시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없었던 나라를 구해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이 입적(入寂)한 곳입니다. 광해군은 대사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영정을 모신 영자전에는 홍제암(弘濟庵)이라는 편액을 내렸습니다. 대사를 기리는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 석장비’는 홍제암 오른쪽의 부도밭에 세워져 있지요.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종 모양의 소박한 부도는 홍제암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세워진 석장비는 높이 3.15m의 당당한 모습이지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면 비석 한가운데가 열십자(十) 모양으로 쪼개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장비가 중요한 것은 사명대사의 일생을 어떤 기록보다 소상히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중의 책방에 나와 있는 사명대사 전기는 대부분 이 비문에 나타난 삶의 궤적을 뼈대로 약간의 문학적 상상력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이 교산 허균(1569∼1618)이라는 것도 석장비의 가치를 높입니다. 한글 소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홍길동전’을 쓴 바로 그 사람이지요. 교산은 비문에서 “나는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이지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산의 비문에는 당시 사명대사에 대한 뜻밖의 시선도 드러나 눈길을 끕니다.‘대사가 중생으로 하여금 혼돈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하였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법의 수호자로 병장기를 잡아야 했던 사명대사의 고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 같습니다.
석장비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합천경찰서장이었던 다케우라(竹浦)가 네동강냄으로써 역사적 가치는 오히려 극대화되었습니다. 일경은 이때 이고경 전 주지를 비롯해 해인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17명의 항일불교인사를 체포하는데, 이른바 ‘해인사사건’입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묻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알고 모두 노리고 있다.”고 일갈한 사명대사의 기개가 해인사에 ‘불온한’ 분위기를 조성한 주범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앞서 일경은 1942년 항일 불교청년운동 조직인 만당(卍黨)의 근거지이자,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창구였던 백산상회의 연락소였던 사천 다솔사를 급습했지요. 다케우라는 합천에 부임하기 직전 사천경찰서장이었다니 두 사건을 모두 일으킨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석장비는 1958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영원히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남았지만, 이 상처가 없었다면 석장비가 주는 감동은 조금 적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명당 혹은 사명대사로 널리 알려진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또는 종봉(鍾峯), 사명당(四溟堂)이라 불렀으며, 유정은 그의 법명이다. 경상남도 밀양군 괴나리의 사대부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成徐氏)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하였다.
그가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일곱 살 무렵 조부(祖父)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우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성현(聖賢)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13세 무렵에는 조선조의 문신으로 이름난 황여헌(黃汝獻, 1486 ~ ?)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수학하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무언지 모를 공허함과 번민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황여헌에게서 『孟子』를 배우던 중 급기야 읽고 있던 서책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곧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 번뇌 없는 학문에 뜻을 두고, 불가(佛家)에 귀의하기로 다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해에 예기치 못한 아버지의 죽음과 다음 해에 연이은 어머니 사망은 그의 다짐을 막아섰다. 결국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후, 16세가 되어서야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뜻을 펼치기 위해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간다.
한편 신묵은 자신을 찾아온 어린 학동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유정(惟政)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사명당은 18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봉은사에 들어가 착실하게 불교공부를 하는 한편 많은 유생들과도 교유(交遊)하며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그의 학문영역은 불법만이 아니었다. 학사대부와 시인에서 조정의 고관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유·불·선을 넘나들며 광범위한 교유를 펼쳐나갔다. 이는 어린 시절 조부와 황여헌에게 배운 유교와 독서의 범위를 그들을 통하여 한층 더 심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중기의 시대상황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의 탄압이 극심하였다. 하지만 사명당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불법에 정진하여 30세 무렵 직지사 주지를 거치면서 불교계의 중진이 되었다. 그리고 32세 되던 해에 대중(大衆)의 요청에 따라 선종(禪宗) 본사인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천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명당은 이를 사양하고 대신 묘향산 보현사 주지인 서산대사(1520~1604)를 찾아가 설법을 듣고, 지금까지의 문장은 꾸며진 유희(遊戱)에 불과함을 깨닫고, 정법(正法)을 배우기 위해 서산대사의 곁에 3년 동안 머문다. 서산대사의 곁을 떠난 사명당은 금강산 만폭동의 보덕암에서 3년을 머문 것을 시작으로 여러 해 동안 전국의 여러 명산을 순례하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운수행각(雲水行覺)을 통해 수행을 하던 사명당은 43세 되던 봄에 옥천산의 조그만 암자[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常)의 법리(法理)를 크게 깨닫는다.
그 후 오대산에 들어가 월정사를 재건하고, 경인년(1590) 여름에 금강산 유점사로 발길을 옮겼다. 사명당이 유점사에 머문 지 두 해 여름이 채 지나기 전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일본군이 유점사에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유점사에 침입하여 승려들을 결박하고 행패를 부리며 금은보화를 요구하였다. 불교문화가 발달한 조선의 고찰에는 반드시 금으로 만든 불상과 불구류(佛具類)가 많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까닭이다.
사명당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불교의 이치로 왜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후 대사는 왜적의 사나운 성질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다칠 것을 우려하여 고성읍(高城邑)에 주둔하고 있던 본부대로 찾아가 적장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글로써 당부하였다. 왜장은 대사의 훈계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를 그곳에서 3일 동안 지성으로 공양하고, 떠날 때는 성 밖까지 사명당을 배웅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영동지방의 아홉 고을 백성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종결될 때까지 승려[의승군]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7년 동안 고군분투하였다. 처음에는 금강산에서 왜적을 만나 불법의 자비사상으로 왜장을 설득하여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두었으나 조선 전국에 퍼져 유린하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침략은 모두 막을 수 없었다.
사명당이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고심하고 있을 때, 마침 조정에서 보낸 근왕문과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義僧兵)을 일으킬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산중에 있는 승려들을 선동(煽動)하여 2,000여 명의 의승병을 조직하고,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 전투(1593)에 참가하였다. 사명당은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한편, 그해 3월에는 서울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대승의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 전공을 높이 사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494년 4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자 사명당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강화사(講和使)가 되어 울산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찾아가서 교섭을 벌이게 된다. 사명당은 왜적의 영중에 들어가 적의 사정을 정탐하고, 가토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 여러 가지 외교적 성과도 거두었다.사명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갑오년(1594)과 을미년(1595)에 상소를 올렸다. 그 후 다시 있을지 모를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기 위해 영남지방으로 내려갔다.
경북 성주의 용기산성(龍起山城)과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축조를 시작으로 전국에 산성을 축조했다. 이때 이미 사명당은 왜적의 재침략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왜적의 증원군이 오기 전에 군사를 재정비한 후, 그들을 급습하여 승기(勝機)를 잡는 것.”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적진의 정황을 정확히 꿰뚫고 정곡을 집어낸 상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섣불리 공격하여 적의 분노를 돋우지 말자는 대답을 내놓았다. 게다가 사명당의 말을 외면하고 오히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명당의 예견은 적중하여 전 국토가 정유재란(1598)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의 추격 속에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1592년에 시작된 7년간의 전쟁이 종결, 선조는 사명당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격시켰다. 전쟁 종결 이후 사명당은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잡혀간 3,5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을 일기로 설법도중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사명대사 부도?
석장비 옆의 부도, 아래 안내문 설명(3단의 연화대좌와 종모양의 탑신 둔중한 지붕돌)으로는 분명한 사명대사의 부도이다.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도 이 부도를 사명대사 부도라고 했다.
어떤가? 부도전 앞의 안내문 맨 아랫 문장을 읽어보면 위의 부도가 사명대사의 부도가 분명하다.
그러나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석장비 옆 부도가 아니라 부도전 윗쪽에 조성된 한 기의 부도가 사명대사 부도이다.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명대사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탑으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사명대사의 탑과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의의가 있다.
“사명대사는 1610년 8월 26일 해인사에서 입적하고 11월 20일 문도들에 의해 화장하였는데, 정주 1구를 얻어 석종을 만들어 그 안에 간직하고 탑을 세웠다”는 석장비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전하는 바대로 사명대사의 부도가 분명하며 건립연대가 확실한 석종형부도의 일례로 판단된다.
사명대사 부도는?
이러한 사례가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 입니다. 2011.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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