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방사, 중촌리 부도군 직전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인다. 영암사지에서 나오면 도로변에서 산능선에서도 보인다. 영암사지는 답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필수 코스지만 흔히 건너 뛰기 쉬운 적연선사 부도이다. 영암사 사적이 미비하여 적연선사 부도 비문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부도비는 현존하지 않는다. 부도비는 어디에 있었을까? 영암사지를 다녀 온 분은 알겠지만 금당터 서쪽에 비신 없는 귀부 2기가 있다. 그 두 기중의 하나가 적연대사 부도비였을 가능성이 농후에 보이지만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출처..오마이뉴스.이땅에서 잘 놀기/초석님 글
1)‘적연국사자광탑비명’ 탁본 영암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 탁본첩에 있는 적연국사자광지탑비명(寂然國師慈光之塔碑銘)이다. 고려 현종 14년(1023)년에 세운 이 비석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증시 적연국사 자광지탑비명 전액 대송고려국 가수현 영암사주 대선사 증시 적연국사 자광지탑비명 병서 (贈諡 寂然國師 慈光之塔碑銘 篆額 大宋高麗國 加壽縣 靈巖寺主 大禪師 贈諡 寂然國師 慈光之塔碑銘 幷序) 중추부사 중산대부 상서이부시랑 겸 태자우서자 사자금어대 신 김맹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조청랑 예빈승 사비어대 신 김거웅은 칙선에 따라 비문과 전액을 쓰다."
비명의 내용을 보면 국사는 광순(廣順) 2년(932)에 태어나 개성 인근의 보법사(普法寺)와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다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물러나길 원하여 1011년 가수현의 영암사에서 거하였고 개태(開泰) 3년(1014, 고려 현종 5년) 향년 83세로 입적하였으며 영암사 서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가수현은 지금은 폐읍이 된 삼가현의 옛 이름이다.
2) 다른 영암사와 적연국사 관련 기록들
앞서 언급한 적연국사자광지탑비명(寂然國師慈光之塔碑銘)에 영암사가 나온다. 「삼가현 읍지」에 황산에는 몽계사(夢鷄寺), 묵방사(墨方寺), 보암사(寶巖寺), 사나사(舍那寺 - 부도사라고도 함) 등이 존재했다고 한다. 지금의 황매산이란 이름은 없고 황산(黃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영암사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에 삼가현(三嘉縣)은 신라 때 가수현(嘉壽縣)으로 불리다 태종 때에 삼가현으로 불렸으며 삼지(三支), 삼기(三岐), 기산(岐山), 마장(麻杖), 가주화(加主火), 가수(嘉壽), 가수(嘉樹), 봉성(鳳城)의 군이름(郡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영암사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강원도 양양의 사림사(沙林寺) 홍각(弘覺)선사의 비문이다. 이 비문 또한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고 일부만 존재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年 後於靈巖寺 修正婁月”라고 하여 “홍각선사는 영암사에서 몇 달 동안 선정을 닦았다”라는 내용이 있다.
홍각선사(?~880)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7세에 출가하여 법랍 50년이 되던 해인 헌강왕 6년(880)에 입적했다고 한다. 역으로 출생년도를 환산하면 813년이 된다. 대략 813년경에 출생하여 830년 전후에 출가한 뒤 840년 전후로 영암사에서 공부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최소한 9세기 중반 즉 850년 이전에 이미 영암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다음 영암사라는 직접적인 이름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경남 산청 지곡사(智谷寺) 진관(眞觀)선사의 비문에 보면 “선사는 918년 영암산 여흥선원(靈巖山 麗興禪院)에서 법원(法圓)대사를 친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여흥선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옛날에는 절의 이름과 지명인 산의 이름을 같이 부르던 경우가 많으므로 영암산을 영암사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산청 지곡사와 합천 영암사의 거리는 아주 가까우므로 이런 상상이 그리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 인동(仁同, 현재 경북 칠곡) 금오산 자락 선봉사(僊鳳寺)의 대각국사비문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한 뒤 그의 부도를 선봉사에 모셨는데 그 부도비의 비문 음기(陰記)을 보면 영암고달(靈巖高達)이라는 글이 나온다. <역대고승비문>(이지관 역, 가산문화사)의 번역을 보면 “거돈사 원공국사의 신측(神則)과 영암사 적연국사의 고매(高邁)한 달경(達境)과 ~~”라고 되어있다.
화엄종출신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선교일치를 표방하며 천태종을 만들 때 당시 불교계의 이름 있는 학승들을 왕명으로 불러 모았다. 그때 고려 중기의 5대사찰의 하나로 영암사가 나온다. 그 당시 천태종 기반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五大寺刹 → 天台宗 基盤寺院 1) 현계산 거돈사(賢溪山 居頓寺)- 圓空國師 智宗(930-1018) 2) 삼가현 영암사(三嘉縣 靈巖寺) 3) 진주 지곡사(晉州 智谷寺) 眞觀釋超 (912-964), 法眼宗 2祖 天台德韶의 제자, 龍冊曉榮 法嗣 4)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수미산문 5) 혜목산 고달사(慧目山 高達寺)
이런 기록에 비추어볼 때 영암사는 최소한 850년 이전에 설립되어 있었으며 고려 초기까지 그 사세가 아주 번성한 절임을 알 수 있다.
영암사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성종 12) 완성 이후, 16세기 전반 중종 때에 편찬된 지리서>에 기록이 없어 그 이전에 폐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라는 스님의 추파집(秋派集)에 “黃梅山 古英俊國師居 其下禁有靈巖寺舊墟 황매산 옛날 영준국사(적연국사의 諱)가 머물던 영암사 옛터가 그 아래 있는데...”라고 되어 있어 넓게 잡아서 18세기 이전, 좁게 잡아서는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이전에 영암사는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는 전체 평면이 팔각형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로 탑의 옥신부(屋身部)와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지고 기단부(基壇部)와 옥개석(屋蓋石)만 남아있다.
상대석은 두 겹으로 된 앙련(仰蓮)을 조각하여 옥신 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기단 중대석에는 각 면에 문양을 양각하였으나 마멸되어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옥개석은 추녀부부 끝을 살짝 들어 올려 경쾌한 느낌을 준다.
지대석은 방향이며 기단의 하대석은 각 면에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그 안에 사자문양을 부조(浮彫)하였으며. 위에는 운룡문(雲龍文)으로 정식하였다
방금 중촌리 부도전에서 폼을 잡고 "부도란 말이야. 신라하대 선종과 더불어 어쩌구저쩌구.그라고 시대적으로 틀려, 이런 부도는 석종형이라하는데 주로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지" 하면서 마누라에게 설說을 풀었더니 적연선사 부도 앞에서 "이 부도는 공이 훨씬 더 들어 갔어니 더 높은 스님의 부도인가 보다?"라며 동의를 구한다. 틀렸어도 맞다고 해야 다음 답사길이 수월할텐데 옳은 이야기를 하길래 "당신 나몰래 공부 좀 했구나"라고 치켜세웠더니 "그러지 마세요. 당신 속마음 벌써 파악하고 있다며" 상당히 세게 나온다. 하기사 이 나이에 마누라 한테 이길 수 있겠는가? 고수는 멀리 있지 않는 법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탁본으로 남아 전하는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의 비문에 의하면 1014년(고려 현종5)6월에 적연선사(932-1014)가83세로 입적하자 영암사의 서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 부도가 서 있는 곳이 영암사의 서쪽에 해당하므로, 이 부도의 주인이 적연선사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암사지 서쪽 귀부 2기에 대한 연구를 더 깊게 하면 반드시 적연국사 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문에 의해 선사의 생몰 시기가 확실하기 대문에 미술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시대적 구분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 부도도 산사태로 위에서 굴러온 자리에 복원하였기 때문에 본디 자리를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부도 앞에 부도비도 복원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나? 답사로만 그치지 말고 제자리 찾기와 작은 단서라도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복원시 참조하였으면 더없이 좋겠다. 이참에 이런 답사단체나 하나 결성해볼까?
보이는 길로 계속해서 가면 중촌리 부도전과 묵방사에 이른다. 그 옛날 처럼 산골에 보리는 저리 익어 가고 있는데, 선사비는 언제쯤 제자리에 다시 설 수 있을지. 부도 자료는 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했다.
2011.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