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용인시

용인...용천리 오층석탑

임병기(선과) 2011. 6. 9. 07:24
728x90

 

 

 

백암면 용천리 산67-1 MBC 드라마 촬영지 구내에 위치한다. 경비실 입구에 닿기도 전에 공사 감독을 하는 분이 출입 목적을 꼬치꼬치 캐물어 내심 불쾌했다. 오히려 개방을 하고 관광코스로 활용하는 것이 오히여 바람직한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용천(湧泉)은 우리말로 ‘솟을 샘’이라고 하는데, 지명 유래가 된 ‘용숫물’이 중리에서 석천리 황새울 넘어가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드라마 셑트장을 등지고 좌측 산능선에 석탑이 서있다.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논 가운데 흩어져 있었으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없어진 몇 개의 부재를 보완하여 1975년 군청 공무원의 노력으로(복원 일화는 글 하단 용인신문 기사 참조)세운 탑이다.

 

 

 

1층 탑신에 비해 상위 탑신 체감률이 급격하다. 5층 옥개석과 상륜은 멸실되었다. 기단면석과 갑석의 규모가 탑신에 비해 좁아 안정감은 결여 되었지만 상승감은 뛰어난다. 옥개석 모서리 처마 부분에는 반전이 보인다. 낙수면의 물매도 완만하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일 것이다.

 

 

탑신과 기단면석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기단 갑석과 옥개석 상부에는 탑신 괴임을 조출하였다.

 

 

용천리 탑의 특징중의 하나가 3층은 탑신과 옥개가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사리장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 받침이 확연하게 표시되어 있다.

 

 

용인시민신문(펌)

버려진 유적 용천리석탑 복원 이야기

 

"옥개석의 정연한 치석 수법,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낙수면 등은 고려 전기의 아름다운 석탑으로서 용인시민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희대의 코메디언 챨리 채플린의 생전에 있었던 일화.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기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채플린은 장난끼가 동하여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심사 결과 3등을 했다. 가짜가 1·2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심사위원들도 그가 진짜 채플린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이처럼 가짜가 진짜를 뺨치는 세상이기는 하더라도 진짜 앞에서 문화재를 자기가 복원했다는 가짜가 있었으니 듣고 있는 진짜가 얼마나 황당했겠는가.가짜가 많다는 소리는 익히 들어왔던 터지만 문화재까지 자기가 복원했다는 종류의 가짜까지 있을 줄이야.


1973년, 그 때 내 나이 30의 청년시절, 31세에 장가를 들었으니 한참 늙은 총각시절이 아니던가? 그 해 10월, 군청에서 문화재 분야의 업무를 맡고 있던 나는 관내 사찰지(寺刹址) 조사를 나섰다.  당시 외사면(지금의 백암면)까지는 버스로 출장을 갈 수는 있었지만 면 소재지부터 30여리 떨어진 용천리까지는 걸어가든가 아니면 면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초행길을 혼자 간다는 것이 여간 막막한 일이 아니었던 마당에 용천리 마을 담당 여직원 박 양이 동행 출장을 해 주겠다기에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자전거는 이장 댁에 맡겨두고 지금의 MBC 드라미아 경내에 있는 사찰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그날, 산기슭 논다랑이에 널부러져 있는 석탑 재를 발견한 것은 매우 큰 수확이었다. 아니 이렇게 훌륭한 석탑이 왜 무너져 있는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사진을 찍고 실측을 하고, 일을 마친 다음 마을에 와 원로들께 물어보았더니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탑을 쓰러뜨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가져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 후로 석탑은 논바닥에 흩어졌고,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용인 가는 버스시간을 맞추려 부지런히 돌아오던 길에 마침내 사고가 터졌다. 타고 가던 자전거가 자갈길에 미끄러지면서 다리 안쪽 바지가랑이가 페달에 걸려 사타구니에서부터 발목까지 부욱 뜯어지지를 않았겠는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도록 바지가랑이가 헐렁헐렁, 그 모양을 해 가지고 어떻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

 

70년대 논다랑이에 흩어진 석탑재 발견

처녀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자전거를 쓸어안고 나둥그러지는 꼴을 보인 내가 창피스럽기도 하고, 이 꼬락서니를 목도한 박 양 역시 웃음을 참다못해 외면을 하면서 볼에 홍조를 띠고 있지를  않던가?에그, 이 외진 길에서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하는 수 없이 그런대로 가까운 길 갓 집을 찾아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초가삼간 집에는 주인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미스 박은 우선 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마침 방문을 열고 보니 재봉틀이 있었다. 윗방에 들어가서 바지를 벗어주자 그것을 꿰매려고 할 때쯤 집 안주인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윗방에서 달랑 삼각 팬티바람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괴이하다는 눈초리로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만, 뭔가 짐작되는 바가 있다는 듯 “아니 남의 빈집에 들어와서 대낮에 시방 뭐하는 짓들이여 이게 응? 원 살다 보닝께 별일이 다 있구만 그랴 잉?” 그도 그럴 것이 멀쩡한 대낮 빈 집에서 팬티바람으로 청춘남녀가 단둘이 있는 꼬락서니, 그걸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지 않느냐 이거다. 이처럼 상황짐작을 끝낸 주인은 참 해괴하다는 눈빛으로 아가씨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만 “아니 아가씨는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면서기 아가씨 아닌가베. 응? 웬일이랴 이게, 아니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그랴.”


미스 박은 이쪽 동리의 담당이었음으로 안면이 있었던 게다. 미스 박은 여차여차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바지를 꿰매야 했기 때문에 빈집에 들어와서 일이 이렇게 되었노라 하면서 뜯어진 바지가랑이를 증거물로 제시하자 주인은 그때서야 의문을 푸는 듯 하면서도 자기의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하여는 약간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어쨌든지 무단 주거침입에다가 풍기사범으로 오인 받아 패가망신 직전까지 갔다가 박 양의 안면 덕분에 가까스로 바지를 꿰매 입고 그럭저럭 막차를 타고 무사 귀환을 했고 출장 기록을 남겨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웬 보살이 찾아와서 자기가 불사를 하고 있는데 석탑을 옮겨가게 해 달라는 청이었다. 마을에 들려 주민들과 협상을 했는데 몇 달 전에 군청에서 이미 조사를 해 갔기 때문에 군청에서 허락을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찾아 왔다는 사연이었다.

그러면서 아주 달콤한 유혹의 옵션(?)을 제시하는 게 아닌가? 슬쩍 눈 한번 감아주면 500만 원을 주겠다는 거다. 당시 오백이면 2년 치의 월급에 해당되는 돈 아니던가?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조금 생각해보니 그랬다가 몇 백 년 전부터 전해오던 마을의 유물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그 연유를 알려고 할 것이고 그 연유가 알려지면 결국 군청에서 눈을 감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테고 뇌물을 받아 챙긴 사실이 밝혀지면 그 때 나는 무슨 면목으로 구천에 계신 조상님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이었다.


나는 이와 같은 사유로 눈 감아드릴 수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더니 그 보살은 돈을 앞세워 공무원을 매수하려던 게 틀려먹었다는 것을 알았든지 그저 아쉬운 듯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뒤인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석조문화재를 일제히 조사하여 보존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이미 조사 실측해 놓은 자료를 보고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2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이전설계를 마친 다음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지금의 MBC 드라미아 입구 소나무 곁으로 이전 복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통일신라 말기 양식 승계한 고려전기 석탑
 
석탑은 불교 고려시대 전기의 것이었다. 옥개석이 신라말기에 건립된 석탑양식을 승계하면서 전체적인 치석과 결구 수법은 고려전기에 건립된 석탑임을 암시한다.일부 부재가 결실되어 새롭게 보강되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5층 석탑이다.기단부의 면석과 초 층 몸돌이 멸실되어 있었고, 5층의 개석과 상륜부 역시 멸실되었으나 용인관내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 미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멸실된 몸돌은 체감비율을 계산하고 보충하여 옛 사람이 남긴 본래의 모습에 가깝도록 원형을 재현했을 때 그 고풍스러운 모양을 보고 어느 누가 나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낀 사람이 있었겠느냐 이런 말이다.


수백 년 돌보지 않던 버려진 문화재, 일제로부터 수탈을 당하고 논바닥에 처박혀 처연하게 나뒹굴던 문화재가 당당하게 제 모습을 찾도록 하는데 있어서 이 중생이 500만 원의 유혹을 뿌리쳐가며 지켜냈다는 것을 긍지로 여기면서 살아오던 마당이었다.  그로부터 삼십년이 또 흘렀으니 그 때 삼십이던 내 나이도 어언 고희를 바라보게 되었다.그리고 내가 문화원장 직을 맡고 있을 때의 어느 날, 우연히 용천리에 산다는 사람 하나가 찾아왔다.

 

나는 거기에 아는 사람이 없지만, 예전의 석탑 생각이 떠올라서 석탑은 안녕하시며 그 옆의 소나무고목도 잘 자라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만 그 어르신네가 하시는 말씀 “아 안녕하시다 마다요 변함이 없습니다. 그 5층 석탑은 바로 제가 복원한 것인데 소나무와 어우러져 사시사철 아주 멋집니다. 한번 보러오세요.”
“아 그걸 선생님께서 복원하셨구먼요?”
“물론입니다요. 참 힘들었습니다. 누가 시켰으면 했겠습니까? 다 고향의 문화재이기 때문에 제 손으로 복원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또 한 번 무너진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선생님께서 다시 복원하신 것 아닙니까?”
“복원한 이후 무너진 일은 없구 설랑 그냥 그대로입죠 뭐.”
“그렇군요. 그렇게 훌륭하신 일을 하시다니 참 존경스럽습니다.”
“뭐 존경스럽기까지야 하겠습니까마는 만약에 제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없어졌을 겁니다, 아마.”
그러면서 은근히 석탑의 관리권이나 여차하면 소유권을 주장할 심산이 깔려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진짜 복원자 앞에서 “석탑 복원했다” 사기

 

문화원에 찾아와서 그 현황을 탐색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것 같았다. 이런 의도만 눈치 채지 않았다면 자기가 석탑을 복원했다고 우기든 말든 서로의 인격을 봐서라도 모르는 척하려 했으나 상황이 구체화되기 전에 그 불순한 의도에 쐐기를 박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바득바득 제 손으로 석탑을 복원했노라고 우기고 있는 이 날탱이 가짜에게 석탑을 복원하는데 기여한 진짜 사나이가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백기를 들까 궁리하다가 한 번 더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선생께서 그 석탑 복원공사를 할 때 혹 날품이라도 파신 거겠지요. 그것도 복원공사에 참여한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요?”
“그게 아니고 직접 제가 이 손으로…”  “선생, 그만 두시오. 그 석탑은 개인이 복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군청에 있을 때 예산을 세우고 복원사업의 실무를 직접 맡았던 사람이오.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계시요. 내 그 증거를 보여드리리다”고 말한 뒤 책 한 권을 그 앞에 펼쳐 보였다.


1997년 1월 용인문화원에서 간행한 졸저 <내 고장 용인, 유물유적 편> 295쪽. 여기에 석탑 발견 당시의 사진과 복원 사업을 완료한 사진이 함께 게재되어 있으며, 복원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제야 석탑을 자기가 복원했다고 우기던 이 가짜는 입을 다물고 풀이 죽어 쥐구멍을 찾고 있는 게 아니던가?


“선생, 오늘 이후에는 어디 가서든지 그런 말을 하지 마시요. 문화재는 엄격히 말하자면 국가의 소유이고 민족의 자산이고 조상이 물려 준 소중한 유산입니다.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바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고 더구나 개인의 소유나 연고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니 딴 생각일랑 마시요. 나는 아직 선생의 함자도 물어보지 않았고 알려고도 않을 것이니 선생의 이름과 명예에 흠집을 내지 마십시오.” 정말 나는 그 사람의 이름도 사는 곳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거짓 주장이 정통 진짜 앞에서 낱낱이 벗겨졌으니 그 얼마나 창피스러웠겠느냐 이 말이다. 아마 더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도 좁으니 어디 가서 거짓말을 또 하리요.

 

옥개받침의 치석 양식, 탑의 아름다움 더해

탑의 구성을 보면 기단부는 단층기단으로 결구되어 있다. 지대석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판석형 석재로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동일석으로 치석된 1매의 석재를 놓아 면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1층은 장대 하나 2층 이상은 규모가 갑자기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수직성이 강하다. 각 층의 탑신과 옥개는 각기 다른 돌로 만들었으나 다만 3층은 탑신과 옥개를 일매석으로 조각하여 만들었다. 1층 탑신은 폭에 비하여 운두가 훨씬 높으며 2층 이상은 폭 보다 운두가 낮아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4층 탑신은 3층의 옥개석 상면에 있는 옥신 괴임이나 4층 옥개석 하면에 새겨진 옥개받침의 크기보다 크다. 각 탑신의 네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조각하였는데 위층으로 갈수록 그 폭이 좁아져 5층 탑신에서는 우주와 면석의 비율이 거의 1:1에 가깝다.지면상 석탑에 관한 양식적 설명을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옥개석의 정연한 치석 수법,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낙수면 등은 춘궁리 5층석탑, 개심사지 5층석탑 등과 매우 닮아 고려 전기의 아름다운 석탑으로서, 용인시민의 귀중한 문화 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이인영...프리랜서 전문기자 (전 문화원 원장)

2011.04.25

728x90
728x90

'경기도 > 용인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인...목신리 보살입상  (0) 2011.06.11
용인...두창리 삼층석탑.선돌  (0) 2011.06.10
용인...백봉리 오층탑  (0) 2011.06.08
용인...가창리 미륵입상  (0) 2011.06.07
용인...미평리 약사여래 입상  (0) 2011.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