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용인시

용인...가창리 미륵입상

임병기(선과) 2011. 6. 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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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사

 

백암면 가창1리 신창마을.  "1914년 붙여진 이름으로, 가곡신창(新倉)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가창리라 하였다. 가곡은 사람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므로 인근에서 일을 많이 하는 마을이라 하여, ‘농사지을 가[稼]’ 자를 붙여 가골·가곡이 되었다. 신창은 옛날 환곡미를 관장하던 창[倉]의 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아침 이른 시간 낯선 마을로 진입하여 골목길에서 독살에 갇힌 물고기처럼  진퇴양난의 처지에 구세주 처럼 나타난신 촌로에게  미륵불이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여쭈었더니 "미륵이 절에 있지 골목에서 찾으면 되겠느냐? 라며 박장대소하시어 나역시 큰 웃음으로 화답했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저런 특기를 가진 사람이 꼭 한 분씩 있어 마을의 제의, 경조사, 마을 행사가 거행되면 선두에서 지휘하고 일사분란하게 일을 진행 시켰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경사회의 공동체 대소사가 시나브로 사라지면서 지금은 자주 접할 수 없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마을문화의 한 단면일 것이다.

 

 

용화사 뒤로 나있는 산길을 5분여 오르면 미륵이 보호각 속에 계신다.

 

 

 목이 거의 생략된 불상으로 불신 보다 머리 부분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이마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가득하다. 얼굴은 머리에 비해 좁고 눈을 튀어나온듯 크게 조각하였으며 코역시 크고 크고 뭉툭하다. 입술선을 활 모양으로 새겨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큰 귀는 어깨가지 닿을 정도로 크다. 몸에는 어린아이손 고사리 손을 닮은 손만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에는 보수한 흔적이 보이고 몸에는 어린아이손 고사리 손을 닮은 손만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양감이 없는 거대한 불신에 옷주름이 없다. 불상보다는 문관상(文官像)에 가까운 모습이다. 조선시대 문관상의 관모에는 화문이 시문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17세기 이후의 상에서 볼 수 있다

 

 

"가창리 석불입상을 닮은 불상으로는 안성시 삼죽면에 있는 국사암(國師庵) 세미륵이나 괴산 능촌리(陵村里) 석불입상 등이 있다. 조선시대 석인상과 불상의 도상이 혼재되어 있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인원 구성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능침 조성에 관련된 모든 일을 전담했던 산릉도감에는 양인(良人) 출신도 많았지만 불교 승려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왕릉의 석인상 조성에 승장(僧匠)이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석인상 제작자와 불상 제작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도상이나 양식이 혼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호각. 관리는 허술 창살에 갇힌 불상보다는 훨씬 여유로워 보인다. 용인디지털 문화대전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20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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