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칠곡군

칠곡...위봉사 석조보살좌상

임병기(선과) 2011. 5. 9.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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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2공단에서 장천으로 향하는 국도변 위봉사 입간판을 보고 한적한 농로와 산길을 들어가면 현대식 전각의 유학산 위봉사에 닿는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듯 인기척에 나오신 보살님이 친절히 앞장을 서며 길눈이를 자청한다. 유학산은 경치가 수려한 아름다운 산이지만  한국동란 때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런 역사적 아픔 때문에  다부리와 왜관지구 두 곳에 전적기념관이 있다. 경치가 빼어나 학이 놀다간 산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칠곡군지에 의하면 본래 위봉사는 가산면 하판리 봉림지 못 자리에 위치했던 고찰이었다고 한다. 전하기를 약 1천 년 전 신라 말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노스님은 출타중이서 또다른 보살님이 나와 친정하게 설명을 이어간다.

 

 

 

불상은 홍수에 떠내려와 스님의 현몽으로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보관 중앙에 새하얀 빛이 솟아나와 신비감을 더하게 만든다고 한다. 실제로 빛을 볼 수 있었다. 한 돌에 불상과 광배를 새겼으며, 보관 아래 이마를 둥글게 돌아가며 엮은 머리카락이 마치 연주문 처럼 열을 이루며 촘촘히 표현되어 있다. 가슴에는 목걸이, 양 손에는 팔찌를 각각 착용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주름은 어깨에서 무릎까지 촘촘하게로 표현하였다.있다. 왼손은 손바닥을 가슴 쪽으로 올리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은 수인이다. 2007년 1월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초기 불상으로 알려져 온다. 이불상이 봉안된 곳은 전각이 아니라 시멘트 굴(?)속이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다. 새로운 전각이 없으면 대웅전에 모시는 것이 차라리 좋으련만.

 

 

디지털칠곡문화대전에는 위봉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오며 그 내용은 다른 사찰 설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봉사를 지은 도목수는 12세의 어린 소년이었는데, 모든 재목을 목침과 같은 나무토막으로 연결해 지었다고 한다. 어린 도목수는 계속 나무토막만 다듬어 수만 개를 챙겨 놓고 “내일은 상량을 한다”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같이 일하던 목수가 어린 도목수를 시험해 보려고, 그 많은 목침 중 한 개를 일부러 감추어 놓았다. 이튿날 어린 도목수가 현장을 살펴보고 나서는, “아- 하나를 빠뜨렸구나. 나의 계산능력이 이렇게 모자라면서 감히 절을 지으려 하다니…” 하고 연장을 챙겨 떠나려 하였다. 그 목재를 숨겼던 목수는 탄복하며, 사실을 실토하고 어린 도목수를 만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위봉사에는 ‘장군수’란 샘물이 있어 장복하면 기운이 왕성하고 장수했다고 하는데, 절의 스님이 장복한 나머지 기력이 너무 왕성해, 밤에는 축지법으로 원근을 배회하면서 여인들을 농락하자, 나라에서 스님을 체포하여 사형시키고, 그 후 신도들이 불계를 조직하여 빈 절을 유지해 왔으나, 못이 만들어지면서 폐찰되었다고 한다.

한편 위봉사에 대해서는 원래 유학산 중턱 암벽 밑에 있었는데, 절 뒤 바위 구멍에서 매일 공양에 필요한 만큼의 쌀이 나와 절이 융성했는데, 한 스님이 욕심이 생겨 막대기로 구멍을 넓히려고 쑤셨더니, 쌀 대신 빈대가 쏟아져 나와 폐찰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봉학지. 유학산 전각 치미에도 봉황이 둥지를 틀엇다. 보살님은 유학산에 사는 봉황을 절집에 모셔오기 위한 상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싫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201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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