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사는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외지에서 답사오는 사람들의 길안내로 가끔 들리는 절이다. 대학시절 이후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절집을 오늘은 도원동 집에서 출발-도원지-삼필봉을 약 5시간 경유하여 산행 최종 목적지로 들렸다. 예전에 답사기도 있어 전통사찰관광정보에서 글을 가져왔다.
용연사의 역사를 전하는 기록으로는 문신인 임수간(任守幹, 1665~1721)이 지어 1722년(경종 2)에 세운 「용연사중수비」와 1748년(영조 24)에 금곡 선청(金谷善淸) 스님이 지은 「용연사사적」 등 두 가지의 사적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두 사적기 모두 용연사의 창건을 신라시대 관기(觀機)․도성(道成) 등 두 분의 성인과 보양(寶壤) 선사가 이룬 것으로 보고 있다.
「용연사중수비」는 신라 말에 보양 선사가 용연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고, 「용연사사적」은 한 걸을 더 나아가 신라시대인 912년(신덕왕 1)이라는 창건연대까지 명시하고 있다. 보양 선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걸쳐 고려를 건국한 태조를 지원하였고, 폐사가 된 작갑사(鵲岬寺)를 다시 일으켜 청도의 운문사(雲門寺)를 창건한 분이다.
보양 선사가 운문사를 창건하기 이전 중국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의 용이 용궁에서 대접하고 아들 이목(璃目)에게 모시고 가도록 하였는데, 보양 선사는 이목으로 하여금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면서 지냈다고 했다. 이처럼 보양 선사는 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용연사와 연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절 근처에 용주폭포(龍住瀑布)가 있는데, 바로 이처럼 용이 나타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효종 4)에 처음 지어지고 1728년(영조 4)에 중건되었다. 3단으로 조성한 대지 위에 세워졌는데 크지는 않지만 장중한 외양으로 잘 정돈되어 있어 18세기의 양식을 잘 대표하고 있는 건물이다. 외부 벽화는 좌측벽에만 조사도(祖師圖) 5폭이 그려졌다. 내부에도 포벽화(包壁畵)로 여래도와 수월관음도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림을 그린 솜씨도 뛰어나 천정과 대량(大樑) 등의 회화 장엄과 썩 잘 어울리고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삼존불상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극락전의 엄숙함을 표현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극락과 사바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즉, 생사 윤회에서 벗어난 상징으로 절에 조성한다. 물과 뭍 두 곳에서 서식하는 두꺼비 처럼 양서류 동물의 서식환경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용연사 극락전(龍淵寺 極樂殿)앞에 단탑으로 설치된 석탑으로서 근년에 보수되었고 단탑기단에 옥신, 옥개를 각각 단석으로한 삼층석탑(三層石塔)이며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기단부는 지부석(地府石)이 보수때 새로운 석재로 대치됐고 면석(面石)은 탱주(撑柱) 한개와 우주(隅柱) 두개씩을 각출하였으며 갑석(甲石)은 부연과 2단의 괴임을 각출하고 상면을 외연쪽으로 경사지웠다.
극락전 삼존불. 많은 자료에는 석가여래 삼존불로 표현했지만 아미타 삼존불이다. 후불탱은 영산탱으로 전각과 본존불과 맞지는 않다. 극락전 앞 루대도 중정쪽에는 안양루 입구에서는 보광루 현판이 걸려 있어 저간의 사연이 궁금하다. 이런 오류는 우리나라 여러 절집에 보이는 사례로 화재등의 이유로 초래된 것이다.
석가후불탱인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이 걸려 있다. 원래 걸려 있던 후불탱의 화기를 보면, 미타탱(彌陀幀)인 아닌 영산탱(靈山幀)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이전하여 소장되어 있는 후불탱은 1777년(정조1)에 조성되어 가로 235cm, 세로 267.5cm의 크기이며 비단채색하였다. 영조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요절한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해 시주했던 탱화라고 한다.
현재 보물 제539호로 지정된 금강계단(金剛戒壇)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통도사의 금강계단,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戒壇形) 사리탑이다. 이곳의 석가여래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 대사가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용연사에 봉안토록 한 것이다.
적멸보궁 법당은 다른 보궁과 같이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뒤쪽 벽을 유리로 하여 사리탑을 바라보면서 참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계단은 1673년(현종 14)에 완성되었는데, 그 내역은 사리탑 오른쪽에 있는 '사바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과 구분되어 조성되어 있는 건물로 잘 다듬어진 축대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져 있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며 처마는 둥근 서까래와 네모진 서까래를 덧댄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올렸다. 건물 창호는 각 3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정자(井)살창으로 짜여져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손하자 사명 대사가 왜적을 물리치고 사리를 안전하게 모셔서 금강산으로 가지고 가서 서산 대사에게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다. 서산 대사는 본래의 자리에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하여,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다시 모시도록 했으나 만일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제자 선화(禪和)에게 태백산 보현사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영남 지방이 안정되기 전이어서 미처 통도사에 봉안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였고, 사명 대사는 포로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에 다녀 온 뒤 곧 입적하자 그 사리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남게 되었다.
얼마 후 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이를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모신 뒤 대중과 상의하여 탑을 세워 봉안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본래의 봉안처인 통도사로 되돌려 모셔야 한다는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뜻을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는 통도사에 보내고, 1과만 이곳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고 한다. 1673년에 완성되었으니 통도사 계단이 파헤쳐진 지 80여 년만에 다시 봉안된 것이다.
이 사리탑은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듬직한 정방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얇은 원형 괴임돌을 두 개 포갠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아랫부분에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 부분을 지나면서 좁아지는 범종처럼 매우 안정감 있고 균형 잡힌 형태를 띠고 있다. 석종의 윗부분에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봉오리를 봉긋하게 새겨 보주를 대신하고 있다. 2단의 기단 중 상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의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네 면을 여덟 칸으로 나눈 뒤, 칸마다 팔부중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하층 기단은 아무 무늬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하였다.
네 모서리에는 본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몇 차례 도난을 겨우 모면하고 나서 지금은 극락전 안으로 옮겨 두었다. 이 사천왕상은 조각 솜씨가 빼어나서 조선시대의 석조각 작품 중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아기 체구에 큼지막한 코와 왕방울 눈을 가지고 귀면 갑옷을 입은 무사상이지만 주먹을 쥔 모습과 몸의 다양한 자세가 매우 역동적이다. 상층 기단의 팔부중과 함께 단조롭고 무거울 수 있는 사리탑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멋진 조각이다.
기단 주위로는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팔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워 연결하였다. 그곳 난간에 촘촘한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하였으나, 다소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계단 앞의 상석(床石)도 그 두툼한 형태가 탑의 기단부와 닮아 보이고, 옆의 석등도 그 솜씨로 보아 난간을 만들 때 함께 조성한 듯하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4)
2010.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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