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달성군

현풍...비슬산 도성암

임병기(선과) 2009. 12. 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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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에서 포장된 산길을 오르면 이르는 유가사 산내암자이다. 창건에 대한 설로 유가사를 창건한 도성국사가 신라 혜공왕 때(765~780) 때 사찰을 개창 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성종 1년(982) 성범선사가 중창하여 만일미타도장을 개설하여 50여년간 지속되었으나 고려초기이후의 사적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지정.비지정의 기준이 뭘까? 비록 도괴된 탑을 복원했더라도 신라 전형에 충실한 삼층탑이다.

 

 

지대석위에 2기단.상하기단 면석에는 양우주. 탱주를 모각하였다. 하기단 갑석에는 우동이 보이고 상기단 받침이 두 개이다.  상기단 갑석은 다소 좁은 듯하며 반전이 없다. 하부에는 부연을 두었고 초층 탑신 받침을 3개 새겼다.

 

 

 

삼층 옥개석 위로는 복원하였다. 옥개 받침은 4*4*4개. 낙수면 물매가 급하며, 모서리 반전은 경쾌하다.

 

 

도성대사나무

이정웅(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믿거나 말거나 겠지만 대구의 남쪽에 우뚝 솟아있는 비슬산(琵瑟山)은 산이름에 임금왕(王) 자가 4개나 들어있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또 한  사람의 대통령이 대구에서 배출된다는 뜻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누구이든 언제 태어날지 모르지만 산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일연(一然)스님의 역저(力著) 삼국유사‘포산의(苞山, 비슬산의 옛날이름) 두 성사(聖師)’에 관한 이야기 중의 한 분인 도성대사(道成大師)는 신라 흥덕왕 2년(827) 명찰(名刹) 유가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유사에서는 ‘도성대사는 북쪽 토굴에, 관기(觀機)라는 스님은 10여리 정도 떨어진 남쪽 암자에 살았다. 서로 사이가 좋아 달 밝은 밤이면 구름을 헤치고 찾아가서 놀았다. 도성대사가 관기스님을 찾아가고 싶으면 비슬산의 모든 나무들이 남쪽으로 누워 관기스님을 영접하는 자세를 취하고 반대로 관기스님이 도성대사를 보고 싶어하면 나무들이 북쪽으로 누워 도성대사를 영접하는 자세를 취해 뜻을 알고 서로가 만나곤 하다가 도성대사가 어느날 홀연히 사라지자 관기스님도 뒤따라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으며,

 

 또한 민간으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는‘어느날 도선이 관기를 만나기 위해 [관기스님은 이름이 유사(遺事)와 일치하나 도성은 신라말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로 표기하고 있어 도성대사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한다] 가던 중 억새꽃에 홀린 나머지 길을 잘못들어 칡넝쿨로 갖은 고생을 다해 비슬산 신인 점수대왕에게 청해 억새와 칡을 없애달라 해 지금도 비슬산에는 두 식물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세월이 하도 많이 지난 탓인가 정상부근의 가을 억새는 오히려 장관이며, 칡도 있다.

 

다만, 일연스님은 향토 경산출신으로 비슬산 동쪽을 대표하는 용천사 주지까지 역임하신 분이자 비슬산에 오랫동안 머물며 정진하셨기 때문에, 이 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나 도성과 관기 두 성사(聖師) 이야기를 하시면서 왜 나무를 매체로 하였으며, 또한 민간 구전 이야기의 내용이 왜 억새와 칡인지 궁금증이 생기는데 그것은 아마 이곳의 식물 다양성이 높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 비슬산에는 북방계 식물인 솔나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면 고산식물인 곰취, 앵초 등이 있고 해마다 개최되는‘참꽃축제’는 진해의 벚꽃축제에 버금가는 꽃을 주제로 하는 전국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되었다. 도성대사가 수도했다는 일명 도통바위는 도성암 뒤에 현존하고 있다. 팔공산의 성전암, 염불암과 함께 좋은 수도처로 알려진 도성암은 스님이 정진했던 초막터에 지은 것이라 한다.

 

절의 규모가 다소 커졌으나 빼어난 경관 만큼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변함없다. 비슬산 등산객들이 쉬어가기 좋고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으로 많이 이용되기도 했으나 수도에 방해된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출입이 신도이외에는 제한되어 아쉽다. 높은 곳에 터를 잡아 전망이 좋은 절 마당 앞쪽을 우뚝 지키고 서있는 수령 200여년의 느티나무를‘도성대사나무’라고 하여 비슬산 지킴이였던 스님을 기리고자 한다.

 

 

"고려시대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 스님 당시에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인의 이름을 딴 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곧 도성이 수도하던 바위인 도성암(道成巖)은 높이가 여러 길이 되었는데, 훗날 어떤 사람이 굴 밑에 절을 지었다 한다.

982년(성종 1)에는 성범 대사가 이 절에 와서 만일미타도량을 열어 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번의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 때 현풍에 거주하는 신자 20여 명이 해마다 모임을 조직하고 향목(香木)을 주워다 절에 바쳤는데, 그 향나무 조각이 밤에는 촛불과 같이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향도들이 향목을 모아올 때면, 고을 사람들이 향도에게 시주하며 빛을 얻는 해(歲)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관기·도성 두 성인의 영감이요, 혹은 산신의 도움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눈이 즐겁다.

 

200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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