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강릉시

강릉...보현사 낭원대사오진탑비

임병기(선과) 2010. 10. 1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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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비가 부슬부슬 내려 마음이 급했다. 비가 심하게 내리면 낭원대사 부도탑을 보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되었다. 산문도 없이 절집 입구에는 부도비가 먼저 객을 맞이 한다.

 

보현사는 확실한 창건 기록이 없으나, 신라 진덕여왕 4년(650)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경애왕 때 범일의 문도(門徒)로 굴 산사 2대 종주(宗主)인 낭원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설로는 신라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돌로 된 배를 타고 천축국으로부터 강릉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문수사가 지금의 한송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완공되었을때 보현보살은 '한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이유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하여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 현재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절을 창건해 보현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경내에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세운 낭원대사 오진탑비가 있는데, 이 탑비의 제명이 ""고려국 명주 보현사 지장선원...""이라 되어 있고, 이 사명(寺名)을 뒤이어 <<승람>>, <<여지도서>>, <<동국여지지>>, << 여도비지(與圖備志)>>에도 '지장사(地藏寺)' 또는 '지장암'으로 표기되 어 있으나, <<범우고(梵宇攷)>>, <<증수임영지>>에는 '보현사'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사찰의 이름이 지장사에서 보현사로 바뀌거나, 보현산 의 이름을 따른 후칭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태조때 지장사(地藏寺)에 세워진 낭원대사의 오진탑비이다. 지장사는 신라시대 말기에 창건된 선원 사찰(禪院寺刹)로서 이 비가 지금 보현사 경내에 있고 <<동국여지승람>> 제44 불 우조(佛宇條)에 있는 ""지장사재보현사(地藏寺在普賢寺)""란 기록으로 나, 또 비문에도 ""고려국명주보현사현산지장선원고국사낭원대사오 진지탑비명병서(高麗國溟州普賢寺賢山地藏禪院故國師朗圓大師悟眞之塔碑銘幷序)""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아도 보현사는 그 산의 이름 을 따른 것으로 원래 지장사의 후칭임을 알 수 있다.

 

낭원대사에 대하여 비문은 신라시대 말 고려시대 초의 승으로 속성(俗姓) 김씨, 휘(諱) 개청(開淸), 진한(辰韓) 계임인(鷄林人)이며, 당대중(唐大中) 8 년 4월 15일에 탄생하여 13세에 화암산사에 들어가 정행법사에 사 사하였다고 하였다. 경애왕은 대사의 덕이 높다는 소리를 듣고 중사(中使) 최영을 보내어 국사로 예우하였으며, 비문에서 대사가 입 적할 때의 기록을 보면, 그가 입적한 동광 8년은 고려 태조 13년 (930) 경인이며 곧 이어 태조으로부터 낭원이란 익호를 받고 탑호를 오진이라 하여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용두화된 귀부를 갖추었고,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紋)이 덮여 있다. 등의 중앙에는 운문(雲紋)으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신을 세웠다.

 

 

이수의 하면에는 앙련을 새기고 그 위의 쌍룡은 중앙의 보주를 향해 힘차게 투각되 었다. 특히 이 비에서 특이한 점은 이수의 상단 중앙에 탑에서처럼 복발과 1단의 보륜을 갖추고 화염에 싸인 보주를 얹은 것이다.

 

 

대웅전 마당으로 진입하지말고 곧장 나아가 산길로 접어들면 낭원대사 부도를 만날 수 있다. 부도는 신라시대 경순왕 4년(고려 태조 13년, 서기 930)에 입적 한 신라시대 말 고려시대 초의 고승 낭원대사의 탑으로 탑비가 고 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탑도 이때 같이 조성된 것 으로 보인다.

 

 

옥개석은 두터운 편이며 하면에 괴임이 있을 뿐 다른 조 각은 없다.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존각에는 귀꽃의 흔적이 남아 있다. 상륜부에는 옥개석 정상에 납작한 특이하게도 복발이 있고, 위에 옥개석  모양의 보개가 있다.

 

 

중대석은 결실되어 중대석 받침 위에는 바로 8각의 상대석이 얹혀 있는데 아랫면 에는 1단 각형 받침을 각출하고 측면에는 중판의 앙연을 조식하 였으며 그 상단에 1조의 대를 돌리고 있다. 탑신은 8각으로 우주가 조출되었고, 전면 하단에 문과 자물쇠 모양이 모 각되었다.

 

 

2매의 판석으로 구성한 넓고 높은 8각 지대석 위에 8 각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하대석 측면에는 장방형의 액을 얕게 조각하고 그 안에 큼직한 안상을 1구씩 배치하였다. 위에는 중대석 받침이 놓여 있는데 측면 하단에 1조의 대를 돌리고 그 위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였으며 윗면에는 괴임을 마련하였다.

 

 

8각 원당형을 기본으로한 탑으로서 예전에 무 너졌던 것을 사찰 입구에 복원하였다가 1991년 원래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루하에 금강문 현판이 보인다.

 

 

 

 인왕이 네분 계신 경우는 처음 접하는 듯하다.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건물로, 3단의 장대석 기단을 설치하고, 막돌 덤벙 주초에 그랭이가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 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소조불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도광 (道光) 2년(1822) 묵기(墨記)의 후불탱이 있었으나 도난 당했다고 한다.

 

  

 

삼존불

 

 

대웅전 앞 석탑 부재. 두어 기의 부재 조합 처럼 보인다. 사진 실력이 없어 뚜렷하지 않지만 탑신에는 석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사자상? 석등간주석으로 알려진 사장상으로 허리를 곳추 세운 모습이다. 얼굴부분에 마모가 심해 확실하지는 않다.

 

 

 

민간신앙과 절집의 조화?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 좌측에 석종형 부도 21기가 군집해 있다. 들어갈 때는 놓쳤는데 나올 때는 보였다. 

 

*** 문화유산 총람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201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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