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덕군

영덕...운서산 장육사

임병기(선과) 2010. 8. 24. 16:17
728x90

 

 

 

 

 

화수루에서 나와 길이 끝나는  운서산. 구름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구름이 깃들어 둥지를 튼 운서산 자락에 절집 장육사가 자리하고 있다. 진입방향을 벗어난 일주문은 사찰 경계를 상징하며 사바에서 듣고 배운 모든 망상을 두고 들어오라는 상징을 벗어나 마치 절집에 들어와서 세속의 분진을 씻어내고 가라는 듯이 보인다. 

 

장육사는 고려 공민왕 4년(1355년)에 이 곳 출신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 세종조에 산불로  화재로 전소하였으며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의 사적은 불분명하다. 임란 이후 장육사 대웅전 복원 공사에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던  목수가 대웅전 일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런데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목수는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었다.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한 목수는 결국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다른 목수가 남은 공사를 마무리하였으나 기술의 부족으로 대웅전은 뱃머리집이 되었다고 한다."

 

그 뱃머리집 대웅전은 어디 있었을까? 한 푼 보시 할 수 없었던 마음을 달래며 지극정성으로 올렸을 대웅전의 부재도 보고 싶고 목수의 애틋한 마음도 느껴 보고 싶지만 5월의 산사는 고즈넉히 객을 반겨줄 뿐이다.

 

 흥원루

 

창건주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에 대한 자료를 가져왔다. 
 

고려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 宗 師禪敎都摠攝勤修 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는 정도(正道)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慧)와 근수(勤修)·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禪)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의 선풍은 그에 의하여 새롭게 선양되었다.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고,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귀의자심삼보(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계율관(戒律觀)에서도 삼귀의(三歸依)가 아닌 사귀의를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계목(戒目)으로는 (1)수정신사귀의(受淨信四歸依), (2)참제제삼업죄(懺除諸三業罪), (3)발홍서육대원(發弘誓六大願), (4)최상승무생계(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일반적인 불교의 5계(戒)나 보살계(菩薩戒)와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또,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 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1권과 <가송(歌頌)>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흥원루 현판

 

1930년대 중수 및 근자에 복원한 루대로 2층은 산사체험의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누하는 종무소와 차실이 자리잡고 있다. "흥원루의 처마 아래에「흥원루」․「탐진당(探眞堂)」이라 쓴 편액이 나란히 걸린 것을 비롯해「전기불사동참방명록」(1981년),「장륙사산령각기(莊陸寺山靈閣記)」(근대)․「장륙사산령각중수시시주결(莊陸寺山靈閣重修時施主訣)」(1940년),「장륙사흥원루중수기(莊陸寺興遠樓重修記)」(1937년),「장륙사중수기(莊陸寺重修記)」(1921년),「장륙사중수운(莊陸寺重修韻)」(근대),「장륙사요사신축시찬조자방명록(莊陸寺寮舍新築時贊助者芳名錄)」(1988년),「장륙사개금불사적기(莊陸寺改金佛事蹟記)」(1911년),「장육사계단불사명록기」(1998년) 등의 현판 및「운서산장륙사(雲棲山莊陸寺)」 편액이 내부에 걸려 있다. 이 가운데「장륙사흥원루중수기(莊陸寺興遠樓重修記)」는 1937년에 이현규가 작성하였다." 

 

장육사 대웅전.  막돌로 허튼층을 쌓은 기단위에 주초를 두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 겹처마 맞배기와 7량가 집이다. 1979년 12월 18일자로 도지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장륙사 대웅전은 태조 4년(1395)에 태조와 그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기리기 위하여 지방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금을 입혔다. 또 숙종 3년(1677)에 수리하였다는 등 자세한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어칸은 3분합 빗살창살이며 협칸은 2분합 빗살창살로 머름대가 없는 구조이다. 측면 창살은 넉살문이다.

 

 수미단 

 삼존불 

 

영산회상도. 대웅전 석가모니불 후불 탱화이다. 중앙에는 촉지인 수인의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인 문수, 보현보살을 위시하여 사천왕과 8대보살, 8대제자, 타방불 4위, 팔부중과 국왕과 왕비등이 합장한 모습으로 배열되었다. 탱화는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1764년 영조 때 조성되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73호이다.

 

 

지장탱화. 대웅전에 있다.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지옥의 십대왕과 판관들을 묘사했다. 1764년 영조조에 조성되었으며 경북 유형문화재 374호로 지정되었다.

 

 

약사여래탱. 좌우에 일광 월광 보살을 모셨다.

 

 

양산 신흥사 처럼 장육사 대웅전에도 불화가 가득하여 마치 천상의 세계에 머무르는 듯하다. 삼존불 위 연등천장의 꽃단청. 화려함의 극치이며 장엄한 공간을 상징한다.

 

 모란

 연꽃 

 

닫집위의 용. 좌우에는 황룡과 청룡을 모셨다.

 

 

측벽의 보현보살. 코끼리가 생동감 있고 힘차게 뛸 듯한 포즈이다. 대웅전 주불이 석가모니불이며 좌우 협시보살이 문수 보현임을 표현한 벽화이다. "장육사 대웅전에 있는 보현보살을 동자상으로 그린 흙벽위에 채색하였다. 흙벽면 전체를 연녹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벽면의 중앙을 꽉 채운 큰 코끼리 위에 타고 유희좌로 앉아 양손으로 연꽃을 받쳐 잡고 있는 모습이다. 문수동자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쌍계머리를 하고 천의를 걸쳤으며 유희좌로 여유롭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육아백상(六牙白象)의 큰 코끼리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그려졌고, 그 주위로 구름문이 문수동자의 하강을 상서롭게 표현하고 있다. 문수동자가 향하는 앞쪽 여백에 ‘보현명연기(普賢明緣起)’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 作으로 보인다."

 

 

좌우벽의 문수 보현 상. 금방이라도 문수보살이 용에서 내려 올 것 같다. 하루종일 바라보아도 눈에 피로가 없을 듯한 색감 이다. "대웅전에 있는 문수보살을 동자상으로 그린 토벽채색(土壁彩色)의 벽화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보살로 주로 법왕자, 즉 동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문수사리법왕자라고도 한다. 해태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가 그려졌는데, 오른손으로 여의(如意)를 잡고 있다. 형상은 보살이 아니라 머리를 양 쪽으로 묶은 동자형으로 표현되었으며 몸에는 천의(天衣)를 걸쳐 막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천의자락이 휘날리고 있다. 그 좌우로 상서로운 구름문이 묘사되었으며 상단 향좌측에 명호가 쓰여 있다. 조선후기 作으로 보인다."

 

 

겹천장에는 비천이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천상의 법음을 연주하고 있다.

 

 

 길상문인 범어

 비파. 피리

 생동감 넘친다. 

 관음전 삼존불

 

사가라 용왕. 관음보살.남순동자

 

 

건칠관음보살. 태조 4년(1395) 위장사 선당의 관음보살상으로 조성되어 태종 7년(1407)에 개금하였다. " 건칠좌불상은 고려조에 판사를 지낸 백진(白瑨)이 공덕주가 되어 영해부사 이귀산(李貴山)과 후임부사 심천우(沈天雨) 및 부민(府民)들의 시주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개금불사에도 백진이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고 한다. 건칠좌불상의 조성목적은 태조 이성계와 현비(顯妃),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처음에는 위정사에 봉안되었다가 위정사가 폐찰되면서 장육사로 옮겨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불상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머리의 금동관에는 얇은 삼각형의 금동판에 꽃무늬 동판을 오려 붙인 것으로 관과 이마 사이는 머리칼이 띠처럼 되어 있으나, 머리 자체는 상투대신 민머리로 기존의 고려 보살상과는 차이가 있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날카로운 코에 눈은 길게 치켜세우고 있어 얼굴 전체는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 숙여진 상체는 건장하면서도 자연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건장한 상체에 비하면 하체는 오히려 작아 보이지만 앉아 있는 범위는 넓다. 불상의 옷은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通肩衣)로 가슴에는 쬒형의 독특한 가사고리 장식과 띠매듭을 하고 있다.


전신의 영락장식은 화려하고 복잡한 구슬장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팔이나 등에까지 이어져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말과 조선초 당대 보살상의 편년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따라서 장육사 건칠좌불상은 15세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일주문을 건너는 다리가 완공되는 날 두고온 내마음을 찾으려 다시 오리라 다짐해본다. 

 

2010.05.26 

***"  "의 글은 전통사찰정보를 참조하였습니다.

 

728x90
728x90

'경상북도 > 영덕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덕...관음사 석불좌상  (0) 2010.08.27
영덕...칠보산 유금사  (0) 2010.08.26
영덕...화수루. 까치구멍집  (0) 2010.08.23
영덕...충효당  (0) 2010.08.22
영덕...갈암 종택  (0) 201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