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덕군

영덕...갈암 종택

임병기(선과) 2010. 8. 2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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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육사 도중에 위치한 창수면 인량리 갈암 이현일 종택. 고려 이후 8대성씨 12종택이 거주하고 있는 인량마을은 예로부터 어질고 인자한 현인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 하여 ‘인량(仁良)마을’이라 불리어진다고 한다. 인량리에는 갈암종택 외에도 우계종택. 충효당. 지족헌.만괴당 등의 많은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이현일 선생의 선생의 휘는 현일(玄逸)이고 자는 익승(翼升)이며 호는 갈암(葛庵) 또는 남악(南嶽)으로 1627년(인조 5년) 정월 11일에 영해부의 인량리 자택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는 석계(石溪, 휘 時明)선생이시고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장씨(安東張氏)로서 경당 장흥효(張興孝)의 따님이다.   선생은 퇴계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한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서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꼽히며, 선생의 퇴계학은 아들 밀암(密菴, 휘 栽)을 거처 외증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에게 이어진다. ( 정부인 인동 장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이며,또한 개인적으로는 우리카페 모든 여자분에게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이문열 소설 '선택"의 모델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걸쳐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칩거하였다.  선생은 40세가 되던 1666년(현종 7)에 경상도 지방의 사림(士林)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1674년 학행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 ·공조조랑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51세가되던 1677년(숙종 3년)에 선무랑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로 임명되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니 곧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전직됨으로서 비로소 중앙정계에 나아갔다. 이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공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으나,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남악초당에서 칩거하면서 1686년에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하고 1688년 8월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현(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사업(司業)을 비롯하여 이조참의 ·성균관좨주(祭主)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 이 시기 산림 ·유현이 거치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책결정 및 관원의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1694년 4월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된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이듬해 겨울에 조식(曺植)을 비롯한 선유들의 학설을 비판한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지었으며 1697년(숙종 23년) 봄에 《돈전최어(惇典최語)》를 편찬하였다.

 

감형되어 전라도 광양에 유배중이던 1699년 2월에,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라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았으며, 1700년 4월에 안동임하의 금소역(琴韶驛)에 우거하기 시작하여 두루 영해와 금소을 왕래하였고 77세가 되던 1703년 7월에는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였다 .  1704년 (숙종 31년) 10월 3일에 우거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78세이셨다.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으며 1718년에 영해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또 1871년(고종 8)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고,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선생이 남기신 저서로는 시문집 《갈암집(葛庵集)》과 중형 존재(存齋 ,휘 徽逸)선생과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등이 있다...참고 문헌 : 17세기 한 영남도학자의 생애 

  

 

갈암 선생은 원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출생·거주하였으나 선생이 40세(1667년)가 되던 해에 영양군 석포면 원남으로 이거, 선생의 9대손이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로 이거, 선생의 10대손이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거하면서 종택을 건축(1910년)하였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 창수면 인량리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영남 북부지역의 총의병 대장이었던 선생의 11대손인 이수악이 항일 구국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했던 곳이다. 많은 문집과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며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명성높은 가문 중 하나이다. 

 

 

영남지방이 고택이 많은 이유가 뭘까?

명문가의 내력등 종가집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낸 조용헌씨에 의하면 경상도 지방에 고택과 종가가 많이 현존하는 이유가 6.25 한국전쟁과 조선조의 영남지방 차별화로 보았다. 한국전쟁 때는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고 하지만 남인이 주류였던 영남 지방이 중앙관로에 진출하지 못한 남인들이 고택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또한 인량리로부터 장육사에 이르는 도로변 마을 앞에는 어김없이 성황당이 남아 있었다. 5천년 민속을 하루아침에 미신으로 몰아부쳐 박살을 낸 새마을 운동을 비켜간 사연이 궁금하다. 고택, 종가집의 역활은 없었을까?

 

 

문이 닫혀 까치발로 바라본 사랑채. 口자형 배치로 뒷편 안채가 높고 앞이 낮은 지붕구조이나, 사랑방은 팔작으로 따로 지붕을 높다랗게 구성하여 사랑공간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채는6칸으로 각 2칸 사랑방 및 사랑대청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직접보지 못해 자료로 대신한다.

"안채는 정면이 5칸인 관계로 안방을 가로로 두지 못하고 세로로 배치하였는데, 그 때문에 안대청이 3칸으로 넓직하게 되었다. 안방뒤에는 뒤주를 설치하였고, 대청우측에 건너방을 마련하고 앞에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볼수있는 외부와 연결되는 좁다란 통래마루를 두었다.

안방뒤주 상부에는 수장고를 만들었으나 건너방 상부는 수장시설이 없고 더그매도 치지않아 상부가구의 결구된 모습이 노출되어 있다. 안채, 외양간 기둥등에서 자귀를 사용한 치목수법을 보이나 사랑대청과 사랑방쪽에는 부재상태 및 대공의 형태에서 조선말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어 사랑채 부분이 후대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원 

 사랑채 좌측 중문 뒤의 건물이 사당으로 보였다.

 

인량리에서는 2004년 전통테마마을로 선정되었으며 폐교된 인량초교를 매입, 콘도형 시설로 리모댈링한 '나라골 보리말'을 운영하고 있다. 나라골 보리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http://narabori.go2vil.org/)를 확인하기 바란다. 

20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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