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덕군

영덕...충효당

임병기(선과) 2010. 8. 22. 22:10
728x90

 

 

 

 

 

 

인량리 전통마을에 위치한다. 조선 성종 때에 처음 세운 집으로 이애 선생이 짓고,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공사중이어서 직접 들어가지 못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우리님들은 훗날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하여 답사하길 바란다.

 

인량동(仁良洞)의 팔대종가(八大宗家)가 취락을 이루고 사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산록(山麓)의 양지바른 자리에 터전을 잡았다. 전관(全觀)에서 북쪽은 태백산맥이 둘러섰고 남쪽은 탁 트인 들판의 한가운데로 송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길지(吉地)에 마을이 동서로 길게 확산되어 있으며, 산록을 파고드는 골의 형상이 나래형국 이라하여 나래골이라 부른다. 본 가옥은 골의 동단(東端) 아늑한 자리를 차지하여 앞쪽 들판을 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좌에 사랑채, 우에 안채를 앉히고 안채의 후방 경사진 대나무숲 속에 사당 일곽을 배치하였다.


 

현소유자 근화(根華)씨(70여재(餘才), 재령이씨(載寧 李氏))의 15대조가 입향시조(入鄕始祖)로 조선 성종연간(成宗年間)에 종택을 초창(初創)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의 집은 뒤쪽의 한단 높은 자리에 이건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확실한 이건연대는 알 수 없다. 충효당(忠孝堂)이란 사랑채는 정자(亭子)와 같은 구성을 보이는데 후학의 교육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임란후(壬亂後)의 건축이라 한다.

 

 

안채,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이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원에도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는 대규모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어울려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의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사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앞쪽 들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뒷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높은 기단 위에는 지금도 후학의 교육장으로 이용되는 충효당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아랫글은 이정웅님이 운영중인 다음브로그 "나무이야기, 꽃 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이정웅선생님의 글은 우리카페'숲과 들꽃' 게시판에 많은 글을 스크랩하였으니 숲 답사시 참고하길 바란다.

 

"이애(1480~1561)가 지은 것인데 임란 후 약간 뒤쪽으로 옮겨 안채와 사랑채, 사당을 지어 조선시대 양반가옥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갈암(葛庵)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났으며 <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 역시 이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러나 영해파를 조선의 명문가(名門家)로 다시 발돋움하게 한 것은 이애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의 노력이 컸다. 1609년(광해군 1)대과에 급제할 만큼 실력도 당당했지만 마당 6,000석의 영남 5위의 부자이기도 했다. 임란 때에는 의병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어 나라 사랑에 앞장섰고, 거처를 잃고 떠돌아다니며 끼니를 잇지 못하는 백성들의 구흘(口吃)에도 힘썼다.

 

특히 흉년이 들어 양식이 모자랄 때 그는 하인들에게 도토리를 주어오게 하여 1년에 200여 가마니를 확보해 찾아온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하루 300여 명에게 죽을 쑤어주었으며, 어떤 때는 7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부인인 진성이씨는 물론 셋째 며느리인 안동장씨(나중에 정부인으로 추증)마저 손톱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이러한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풍습과 어진 마음으로 적선(積善)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란 후손들이 어찌 훌륭하게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손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은 외할아버지 장흥효로부터 학문을 배워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휘일은 <존재집> 등을 남기고 인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아우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역시 형 존재와 함께 학문을 배우고 학행으로 천거 몇 번의 사양 끝에 마침내 출사하여 남인(南人)을 홀대하던 시대에 반대파의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조(吏曹)판서에 올랐으며, <갈암집>을 남겼다. 역시 인산서원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퇴계학파의 계승자가 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영양 두들 마을로 분가(分家)한 며느리 안동장씨 역시 시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그곳에 도토리가 열리는 굴참나무를 심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고, 운악은 충효당 앞에 은행나무 한 그루 심었다."

 

안채...출처/문화재청

 

중수후에는 어떻게 자리할지 우리님들의 몫으로 남겨둘랍니다.

 

반듯한 내정(內庭) 정면에는 3칸 대청(大廳)이 놓이고 좌측에 샛방, 우측에 도장방과 안방이 접하였다. 내정의 좌측 사랑방 부분은 샛방에서 1칸왼편으로 벗어나 있는데, 이는 내정을 넓히기 위하여 확장된 것으로 초창평면(初創平面)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안채 부분의 목재에서도 구재(舊材)가 많이 보이고 있어 이 부분도 이건시 다소의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청의 후면벽중(後面壁中) 우측 2칸의 각칸에 있는 두짝열개 널문에 중간설주가 서 있는데 윗틀 하면(下面)에 별도의 오래된 장부구멍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재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건시기를 조선 중기로 추정하게 한다. 안채의 구조는 높은 축대를 쌓고 자연석 초석위에 방주(方柱)를 세웠으나 대청앞 기둥만은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대청 상부는 삼량가(三樑架)에 제형(梯形) 판대공(板臺工)을 세운 간략한 가구(架構)로 되어 있다.

 

 

충효당

 

높은 자연석 축대위에 서 있는 사랑채(충효당(忠孝堂))는 정자이면서 사랑채로 살림채 왼쪽에 별도로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도 교육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건물 오른쪽으로 ㄱ자형 온돌방을 놓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만들었다. 마루 앞쪽은 4짝 들문을 달았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창을 달아 놓았다.

 

자연석 초석위에 방주(方柱)를 세웠고 대청 상부 가구는 오량가(五樑架)로 파련대공의 윗몸에 첨차를 끼워 종도리(宗道里)를 받았으며 합각 하부만 우물반자로 처리하였다.

 

 

 

운학 이함이 심었다고 전해오는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충효당의 역사를 간직한 노거수로 가문의 부침과 질곡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향교와 서원 고택의 은행나무는 다산과 풍요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2010.05.26 

 

728x90
728x90

'경상북도 > 영덕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덕...관음사 석불좌상  (0) 2010.08.27
영덕...칠보산 유금사  (0) 2010.08.26
영덕...운서산 장육사  (0) 2010.08.24
영덕...화수루. 까치구멍집  (0) 2010.08.23
영덕...갈암 종택  (0) 201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