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당진시

당진...상왕산 영탑사

임병기(선과) 2010. 6. 24.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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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감할 시간이 다가와 마음 급하게 영탑사를 찾았다. 탑과 마애불을 뵙기기 위한 순례길로 작은 절집으로 생각했었는데 큰 가람이었다. 소란스런 사하촌도 없으며 일주문 천왕문을 대신하여  수령 40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82년 보호수 지정)가 반겨주는 절집은 크게 뒤산을 배경으로 넓은 중정을 가진 대웅전 영역과 본래 위치로 추정되는 좁은 산자락에 위치한 유리광전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늦은 시간에 찾았는데 반갑게 맞이해주신 스님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영탑사는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설과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하면서 7층 석탑을 세우고 영탑사라 불렀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현재 절에 남아있는 유물 가운데 고려시대 작품이 있어 고려 창건설에 무게를 두지만 초창시기와 창건주는 좀더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창건 이후의 역사 역시 대부분 공백 상태이다. 려말 선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건하면서 지금 유리광전에 있는 불상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으나 이 역시 뒷받침할 자료는 없다.

 

조선시대에도 후기 지리서에 겨우 그 존재만 등재되어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영탑사는 군의 서쪽 5리에 있다’란 기록이 보여 조선후기에 절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798년에는 연암당(鍊岩堂) 지윤(智允) 스님이 현재 유리광전인 법당을 중창하였다. 당시 주불전은 유리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전통사찰관광정보 

 

 

어칸 4분합문으로  화려한 꽃창살 좌우 대칭이다. 꽃살은 바탕살을 짜고 그 위에 조각판을 덧붙인 구조이다. 문양은 대 숲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와 구름 사이로 용트림하며 하늘로 오르는 용, 연지와 비천이다. 개인적으로는 민화의 상징성으로 해석하고 싶다. 물론 용과 호랑이는 벽사의 의미가 분명하리라 생각된다. 

 

 

좌측 협칸. 좌우의 협칸도 대칭 문양이다. 노송과 학은 무병장수. 금슬. 모란은 장엄의 상징으로 본다.

 

맨우측 협칸 문양

 우측 협칸 문양

 

측칸도 좌우 대칭의 동일 문양이다. 공주 동학사, 영주 성혈사 꽃창살에 대한 해석이 옛님의 숨결방에 있으니 참조하길 바란다.

 

 대웅전 석가모니 삼존불

영탑사 금동비로자나삼존불...문화재청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우리님들 참조하시고 스님께 청을 넣어 보길 바라며 전통사찰정보에서 자료를 가져 왔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을 배치한 금동삼존불상이다. 총 높이 51cm, 본존높이 27.5cm, 좌우 보살 높이 18cm이다. 고려시대 중엽에 제작한 작품으로 보물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모셨으나, 크기가 작고 아름다워 1975년 도난당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기 직전에 수습하여 다음해 겨우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은 별도로 봉안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식은 팔각연화대좌 위로 솟은 3개의 연꽃 위에 각각 삼존이 결가부좌한 형태이며 중앙 비로자나불을 크게, 좌우 협시보살을 작게 만들었다. 본존은 원만한 방형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코와 입을 갖추고, 나발의 머리에 낮고 큰 육계가 솟아있으며 그 경계에는 반원형의 보주를 표현하였다.

 

귀는 길며, 이마에는 백호의 표현이 없으나, 목에는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흐른 옷자락은 배 부분에서 U자형을 이루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에서는 양쪽으로 갈라져 수평으로 흘렀다. 가슴에는 내의와 리본모양의 승각기가 드러나 있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다소 빈약한 편으로 긴 상반신에 비해 결가부좌한 하체의 폭이 좁아 균형감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검지를 세운 오른손을 왼손이 감싼 지권인의 형태이며, 대좌는 앙련의 연화대좌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상호나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본존과 흡사한데, 화려한 보관과 어깨에 흘러내린 보발, 화려한 영락장식 등에서는 보살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를 모두 갖춘 연화좌로 상대와 하대는 앙련과 복련, 그리고 안상을 조각하여 장식하고, 팔각의 중대에는 각 면마다 화문을 투각하였다. 전체적으로 세부수법이 다소 경직되고 단순화된 느낌을 주지만, 상호와 좌대의 화려한 장식, 본존의 승각기 등에서 중국 송나라 불상수법을 이은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엿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범종.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제작년도가 확실한 범종으로 ‘건륭 25(1760년/영조 36)년 경진년 2월 가야사 법당에 조성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고 하니 남연군 묘자리 조성으로 가야사가 폐사되면서 영탑사로 옮겨온 모양이다.

 

종의 형태를 살펴보면, 용뉴는 네발을 힘차게 뻗었고 대부분 조선종 처럼  음통이 없다.상대에는 길상의 상징인 범자문을 있고, 중대에는  9개 종유가 있는 유곽,  보살상을 조성하였다. 하단에는 시주자와 조성기를 양각으로 조성하였다. 

 

 

유리광전 영역. 사진 우측 전각이 유리광전이다.

 

 

유리광전의 마애약사불을 봉안하였다. 불상으로 인하여 전각 이름표를 달았겠지만 못난 중생 눈에는 약합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비울수록 탐진치가 더욱 쌓이는 불쌍하고 가엾은 놈임에 분명하다.

 

상호는 원만한 방형으로 반쯤 뜬 반달형의 눈과 작은 코, 인중이 도드라진 입을 얕게 조각하였으며, 소발, 육계가 높다.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며 법의는 통견으로 습의는 분명하지 않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왜소하며,  전체적으로 거칠게 조각되었다. 주형광배 형태의 자연암반에 돋을새김된 마애불은 고려 중엽이후 불상으로 전해온다.

 

 

 

마애불에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말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갑자기 기암괴석이 나타나 이를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고 국태민안을 기원하여 마애불을 조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또한 1835년(헌종 1) 면천 대치리에 사는 이씨부인이 마애불 앞에서 백일기도를 올려 그 정성으로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이 8살 되던 해에 유리광전 편액을 썼다는 것이다.  

 

 

 

진달래꽃 공양을 받은 체감률이 경쾌한 7층석탑은 유리광전 뒤편 영탑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 위에 자리했다. 탑신과 옥개석이 각기의 돌이며 탑신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두터운 옥개석 받침은 3단으로, 낙수면 물매는 얕고, 모서리에는 약간의 반전을 보인다. 새로 만든 6층과 7층은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리고 층급받침도 얇아서 서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상륜은 간략화된 모습이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에 관한 이야기는 몇 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고려중기 보조국사에 의해 7층 석탑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할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면천군 동헌에서 7층이 넘겨다보여 재난이 들고 불길하다하는 이유로 탑 높이를 5층으로 축소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세 번째 이야기는 가야사 폐사 후 탑과 종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지금 대웅전에 있는 가야사 범종을 볼 때 가장 신뢰할만한 이야기 처럼 생각된다. 1911년 신도들이 원래 모습대로 7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소풍 가는 날...최제형                                

개나리 노란 꽃
울타리에 피는 날
친구 손잡고 소풍 가지요.

천년 은행나무 교정을 떠나
개구리 풀쩍 뛰는 논둑 길 위로
재잘재잘 대며 줄지어 가지요.

들에는 벌써 파아란 새싹
절골 고목에도 새순 돋는데

웅산 둘러서 약수 흐르는
칠층석탑아래 솔밭에 서면
고운 산새들 날아와
반갑다고 노래하네요.

진달래 다홍빛 곱게피는 날
오리길 영탑사로 소풍 갔다가
재잘재잘 대며 줄지어 왔지요.

 

[면천초교 출신 최제형 시인의 동시를 가져왔다.]

 

2010.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