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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태안군

태안... 백화산 흥주사

by 임병기(선과) 201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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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은 답사 목적 보다는 아이들과 여행을 다녀왔고, 몽산리 석불좌상, 남문리 석탑, 마애삼존불은 이미 뵈었으나 동문리 석탑을 찾기위해 동선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동문리 석탑은 많은 분들에게 탐문했으나 소재를 알지 못 했다.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흥주사로 발길을 돌렸다.

 

마애삼존불과 태을암이 위치해 있는 백화산 자락에 흥주는 소재한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마음속에 세운 절집에는 천년 향기를 품은 은행이 먼저 객을 포옹한다. 낮은 자세로 한계단 한계단 오르면 소박한 아낙 모습의 만세루가  루하를 양보하며 옆길로 중정으로 들게한다.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222년(구수왕 9)에 흥인조사(興仁祖師)가 창건하였다 하나 역시 신뢰성은 떨어진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백화산성(白華山城) 내 군영사찰로 1417년 산성과 함께 창건된 것으로 보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두 설 모두 정확한 근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지며, 현존하는 유물 등을 볼 때 흥주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28호)은 구조나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세루(유형문화재 제133호). 산지가람에서 루는 누하진입이 일반적이지만 경남 고성 옥천사 자방루 처럼 승병과 관련된 사찰에서는 루하를 폐쇄하는 사례가 있다. 흥주사 만세루도 임진왜란 때는 산성 내 승병들의 무기고로 사용되었다는 얘기로 미루어 수긍이 된다.

 

1993년 보수공사 때 1527년(중종 22) 12월 개건(開建)하였고, 1691년(숙종 17)에 중창(重創)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삼중창, 1798년(정종 22) 사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홑처마맞배지붕이다.

 

만세루 마루에서 찐빵을 먹고 있던 보살님 서너분과 스님 두 분이 같이 먹자고  여러번 불렀지만 숫기 없고 낯가리는  못난 중생 이라 머뭇거렸더니 스님이 직접 두 개를 가지고 오셨다. 꿀맛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나선 길. 지금까지 점심을 굶고 돌아 다녔었다. 미안해 손에 차고 있던 연밥 염주를 드렸더니 무척 고마워 하시며 스님의 속가가 대구에 있다고 차를 권했다.  스님 두분이 계시는데 한 개만 드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답사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연밥염주를 만드는 경산에서 염주를 구입해 스님께 택배로 보내드렸다.

 

 

근자에 지은 듯 하다. 스님과 말씀 나눈 다고 부처님은 뵙지 못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다포계 맞배집 빗살 창살이다.   

 

正初 興柱寺에서...平素/ 이정우


오늘 흥주사 가는 소나무 숲길은

솔바람이 남겨놓은 정적처럼

스님의 깊고 청량한 염불소리가

소리로 묻어둔 삶의 등짝을 다독입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며 향기로 가슴을 열고

좀 더 가까이 다가섭니다.

만세루 뒤로 대웅전 우러러 보며

천년을 살아온 은행나무 앞에는 누구의 불심인가

켜놓은 촛불들이 소원으로 머리 숙여

두 손 모음을 봅니다.

백팔 배는 숫자를 말함이 아닌 것을 압니다.

마음이면 지성이려니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모두 다 함께 있음입니다.

불자 신도들의 정초 참회기도를 고이 합장하여

가슴으로 담습니다.

불성(佛性)을 간직하려함은 청정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진실한 자비의 길 걷기 위함 입니다.

부처님 큰 뜻을 생활로 실천하려는 노력입니다.

능선 넘어서 산사를 찾은 바람도 봄 냄새 선 듯 꽃가루로

저만치 뿌려놓고 갑니다.

앞 등성이 너머 멀리 보이는 메마른 들판에는

누런 황사가 난무합니다.

거짓들이 참 인 듯 꽃을 시기합니다.

굴러온 돌이 자연의 진실을 비웃어 던집니다.

혼란한 난장 터에 흙바람까지 춤을 춥니다. 

사람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윤리

꽃으로 피지 않는 인간애 부정한 탐욕들이

눈 찔근 감고 선(善)이 됩니다.

‘소천(召天) 귀천(歸天)

잘 가려면 잘 살아야지’

백화산 줄기가 여기에 와서 고즈넉하게 머문 곳

광대무변 하신 부처님의 푸근한 미소가

민초들의 적막한 뜰 안에

햇볕으로 머뭅니다.

세상 아름다운 꽃들은

본래 소리 없이 피고 집니다.

 

[텃밭 문학에서 발췌]

 

한석봉?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삼층탑. 훼손이 심한 상태다.  2 기단으로 상기단 갑석은 좁고 두텁다. 몸돌과 둔중하고 투박한 모양의 옥개는 별석이며, 3층 몸돌과 옥개는 결실되었다. 옥개받침은 3단, 모서리는 반전하였다.
 

 

3층탑이 결실된 자리에는 다른 부재를 올렸다.

 

 

독특하게 초층 몸돌 각 면에 목적불명의 윤곽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 또는 문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층 몸돌의 양우주는 닳아 희미하게 보인다. 판단컨데 기단 면석과 멸실된 3층 몸돌에도 우주가 있었을 것이다. 석탑앞에 높게 조성한 배례석도 지대석으로 보여진다. 고려말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 9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0m, 둘레 8.5m이다. 이 은행나무는 약 4m 높이까지는 외줄기로 되어 있고 그 위부터 몇 개의 줄기가 곧게 하늘을 향해 갈라져 있다. 가을에는 절집 전체가 노란빛으로 물들 것 같다.

 

은행나무는 지금은 사찰의 소유가 아니라 태안군민의 나무로 받들며 마을의 안녕과 벽사 기자신앙과 자손 번창의 상징으로 생각하여 매년 음력 9월 9일 막걸리 3말(60ℓ)을 대접하고 은행나무제와 백일기도제 행사를 개최한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먼길을 가던 노승이 백화산 산기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꿈인 듯 하얀 산신령님이 나타나 노승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을 장차 부처님이 상주할 자리이니 지팡이로 이곳에 표시를 하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기이한 일이구나 생각한 노승은 꿈에 산신령님이 가리킨 지팡이를 그곳에 꽂아두고 불철주야 기도를 하니 신비스럽게도 지팡이에서 은행나무 잎이 피기 시작하였고 노승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더욱더 기도에 정념하니 또다시 산신령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 나무에 자식 없는 자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게 되고 태어나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얻어 부처님을 모실 것이니라 하며 사라지셨다. 그 후 몇 십 년 후 산신령님 말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해 사찰이 지어졌고 이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탐스런 은행과 항상 푸르름처럼 부처님의 손길이 자손만대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노승은 절의 이름을 흥주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20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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