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금산군

금산...진락산 보석사

임병기(선과) 2010. 4. 29.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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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촌이 한가롭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에도 좌판 가득 봄나물을 진열하신 시골 할머니들이 정겹다. 유명 사찰 사하촌 할머니들은 상업적인 느낌이었지만 보석사 주차장 주변은 토속적인 시골 장터를 연상케 했다. 애써 팔려는 표정도 없다. 그냥 오는사람 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계절을 즐기시는 표정이다. 답사도 이래야만 하건만 나의 몸과 마음은 느긋하지 못하고 총총걸음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 소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소하였기 때문에 보석사란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918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보석사의 창건연대는 신라 헌강왕 12년 886년에 조구(祖丘)조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헌강왕은 886년에 죽었기 때문에 886년은 정강왕 1년이 되기도 하여 어떤 기록에는 보석사의 창건연대를 정강왕 1년(886)으로 보기도 하나 <<조선불교통사>>에 따라 헌강왕 12년(886)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그렇다고 하여 보석사가 886년 조구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는지는 아직 미상이다. 조선시대 태조 때 국사를 역임한 조구(祖丘)국사가 있는데 신라의 조구대사는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조구국사를 가탁(假託)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구국사는 천태종 승려이고 보석사의 주전각도 대웅전이라 둘의 관련성도 높다. 천태종에서 받드는 부처는 석가모니불이고 대웅전의 본존불도 석가모니불이다.

보석사는 1530년대까지 존속하였고 이 절이 소장했던 1649년작 감로왕도(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나 1760년작 범종의 예에서 보듯이 18세기 중후반까지 사격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나 18세기 말기에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보석사가 다시 중창의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830년대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승병장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렸던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 영규대사는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선과 무예를 닦았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명성황후가 중건했다고도 한다.  보석사는 1912년 30본산의 하나로 33개의 말사를 거느리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마곡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려다 전사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고 있는 비가 가장 먼저 길손을 반긴다.
"영규대사(?∼1592)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동안 통곡한 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승병 수백명을 모아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고, 이어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일은 이후 전국적으로 승병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숙종 5년(1839)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일제가 1940년 비를 보호하던 비각을 부수고 비를 묻어놓았던 것을, 해방 후 다시 꺼내 세워놓은 것이다. 영규대사를 기린 <의병승장비>는 일제강점기 땅에 파묻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의병승장비>는 우의정 조인영이 지었고  금산군수 조최영이 글씨를 썼다.

 

영규대사는?

조선 선조때 고승. 임진왜란 때 순절한 승병장. 서산 유정의 제자.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 계룡산 갑사에 들어가 출가하고 뒤에 휴정의 문하에 들어갔다. 공주 청련암에 있으면서 선장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 동안 통곡을 하고 의승 수백 명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을 수복하였지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조헌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와의 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나서려 하자 영규가 이를 말렸다. 그러나 그가 듣지 않아 혼자 사지로 보낼 수 없다 하여 함께 금산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들을 기린 곳이 칠백의총이다. 영규가 최초로 일으킨 의승은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승려 대인이 금산 남쪽 진악산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진영각(뒤의 선의각)과 비를 세웠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이어지는 약2~300미터(?)전나무 숲길. 전나무 숲길과 나란히 어깨동무한 계곡물소리를 즐기며 느긋하게 따라가면 1000년 풍상을 간직한 보석사 은행나무와 대웅전 중정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반대편 범종루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이 길이 진입동선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모호하다. 오늘도 산지가람 진입공간은 소나무 숲길이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월정사.내소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나무 숲길은 평지가람이라는 오류를 범했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 반대편 자락에 위치한 보석사 입구 5기의 부도. 조선후기 부도로 탑신에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맨좌측으로부터  팔각원당형 적조당(寂照堂) 부도. 채도당(採道堂) 부도는  기본적으로 석종형이며, 탑신도 2단의 단을 지워 탑신과 상륜부의 형으로 모각 되었다. 전춘당(栓椿堂) 부도.석종형 부도이며 연화판의 상륜이 표현되어 있다.  송월당(松月堂) 부도는 방형 기단 위에 안치된 석종형 부도로 연화판이 상륜으로 모각되어 있다. 맨 우측의  동암당(東岩堂) 부도는 1990년에 조성하였다.

 

 

범종루

 

 

일제강점기 말엽. 전국 유명 사찰 순례한 고암의 스승 해강 김규진과 죽농 안순환의 작품인 보석사 현판이 보석사에도 남아 있다.

 

 

춘래불사춘? 산사에는 아직 봄이 먼듯 겨우살이 살림을 걷어내지 않았다. 비닐 보호막 보다 더 답답한 것은 한켠에 놓인 사진 촬영금지란 문구였다. 소심한 중생. 법당문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돌아섰다. 봄날은 아직 꿈이련가?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며 수도 정진했던 의선각은 공사중이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이 달려있다. 창호는 띠분합문인데 어칸은 사분합문으로 협칸은 삼분합문으로 달았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599년 삼인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628년 무진년(인조 6년) 인해스님이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머름대가 높은가? 발판이 놓여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보석사 감로탱(中央博物館所藏, 1649年, 麻本彩色, 238×228㎝)

 

1649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충남 금산읍 진락산 보석사에 봉안되었던 감로탱화이다. 감로탱화의 특징은 과거를 나타내는 하단, 현재인 중단, 미래인 상단으로 이어지는 삼세(三世)의 시간이 한 화면에 구성되어 위계적 구분이 엄격한 불화라는 점이다. 상단에서는 다가올 내세의 구제력을 보여주며, 중단에서는 법회장면이라는 현재를 표현하였고, 하단에서는 전세의 업을 인간의 희노애락과 죽음이라는 현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하단에서는 전쟁 장면, 의지할 곳 없는노인, 불이 난 장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장면, 무너진 집에 깔린 장면, 역대 군왕의 모습 등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상단의 칠여래와 보살들을 가장 크게 부각시키고 그 다음 단계로 중단에 왕후장상과 선인을, 하단에는 중생계의 장면을 작게 그렸다. 뒤로 갈수록 커지는 역원근법의 구성을 취하였다. 상들이 밀집하여 공간의깊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평면적인 배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성방식은 고려시대의 「미륵하생경변상도」나 「화장사 지장시왕도」에서 익히 사용했던 고려시대의 전통으로 아사다데라 소장의 「감로탱」에도 적용된 공간구성방식이다.

 

또한 장면들을 구획할 때에도 가운데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구름으로 구분하고 앞의 백성들은 산으로 구분하여 산과 구름 간의 격을 달리 하였다. 그런데 이 감로탱의 중앙을 크게 차지하는 제단은 흥미롭게도 지지대에 고리로 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아무리 제단이 성찬이라 할지라도 그림인데 굳이 그림 속의 그림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당신의 경제 사정을 잘 대변해 주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무렵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성찬 대신 그림으로 대체하는 풍습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전쟁으로 인한 변화는 중생계의 풍속장면에서도 나타난다. 화면 아래 중앙에는 치열한 전쟁장면이 등장한다. 창과 조총을 들고 싸우는 모습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장면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처럼 감로탱은 정교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생활상을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000살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34m, 가슴높이의 둘레 10.72m의 크기로 뿌리부분에 2∼3m 높이의 새로 난 싹이 수없이 돋아나 신기하게 보인다. 이 나무는 마을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해진다.  시절이 어수선한 요즘에도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법당 내부를 들리지 않은 답사? 은행잎 곱게 물든 가을날 다시 찾아오련다. 그때는 법당문이 활짝 열려 있기를 기대하면서...

 

보석사에 갔는데...김종제

 

 

낮술 같은 해에 취해
헐떡거리는 게
집 찾아
먼 길 달려온 짐승 같다
절을 찾아가다니!
나도 누구에게 길들여졌나 보다
그늘 찾아 들어선 곳이
천년도 더 묵었다는
은행나무다
제 무게 못 이겨
휘청, 쓰러진 큰 가지가
땅을 파고 들어가
옥잠화 한 가지
손에 들고 두둥실 떠올라
주인 찾아가는 길이다
천길 절벽 같은 세상에 걸린
나무다리 하나만 건너면
금을 캐서 세웠다는
보석사(寶石寺)다
보석이라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보아도
내가 훔쳐 갈 것은
겹처마 맞배지붕의 대웅전 뒤로
여인네 젖가슴의 담벼락과
옛기와의 마음뿐이다
분명 꽃 한 송이 보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릎 꿇고 삼배 드리니
부서진 비석 아래
칠백이나 묻혔다는 무덤 앞이다 

 

2010.04.10 

 

전통사찰관광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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