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금산군

금산...천내리 용호석

임병기(선과) 2010. 4. 27.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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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석 보호각

 

아침 일찍 대구에서 출발하여 어느덧 금산 고을에 접어 들었다. 제원면을 네비에 입력후 느긋하게 김하정의 '금산 아가씨'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사천리로 천내리에 도착하였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 번지 이곳 넓은 들판에 용과 호랑이 석상이 서 있다. 풍수에 문외한이라도 좌청룡우백호는 알기에 음택 풍수에 따른 석상으로 이해될 것이다. 조성 목적이 두어 가지 전해 내려오지만 이제는 민초들의 기도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하다.

 

용석

 

용석은 소용돌이 모양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는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 아가미와 수염이 묘사되어 있다. 미적 감각이 둔한 나에게도 지방 장인의 작품 보다는 국가의 후원을 받은 장인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용석 후면

 용석 측면

 

"AD 1370년(고려 31대 공민왕) 석재 조각, AD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족 침입으로 안동(安東)에 피난시 풍수지리 사상에 의하여 대길지(大吉地)를 찾도록 지사(地師)에 명하였고 태백산 지맥에 평사락안 부사도강(平沙樂雁 浮莎渡江)의 명당이 금주(즉 금산(錦山))에서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있으니 왕능이 될 지대라고 하여 왕이 자신의 능소로 작정하고 왕능에 필요한 용석과 호석을 제작하였다.

 

고려 후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내려온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 위치를 정하여 필요한 석물을 준비토록 하였던 것을, 왕이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호석 보호각

 

용석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 가운데에 호석은 자리하고 있다.

 

 

"한편 호석(虎石)은 110㎝×65㎝의 장방형 대석(臺石) 위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있는 모습을 조각했는데 동체에는 두툼하게 융기(隆起)된 곡선과 원형을 교호(交互)로 조각하여 호랑이 털 모양을 만들었다. 몸체는 서향하고 있으나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크게 열고 있다."..문화재청


 호석 정면

호석 후면

 

또 하나의 추측은 천도설로 경산대 최창조 교수의 이야기를 보자.  

"최 교수는 "공민왕이 권신들을 몰아내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하여 토지재분배, 노비해방 등의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시도한 흔적이 역사적으로 나타나는데, 풍수지리를 개혁의 한 수단으로 활용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풍수지리를 활용한 흔적이 곳곳에 있는데 스스로 토목공사, 노국공주의 능 선정, 개경의 기세가 쇠하였다는 이유로 천도할 곳을 평양과 충주로 정하기도 했다. 물론 공민왕은 천도의 터를 평양과 충주만 정한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좋은 땅을 수소문해 천도의 터로 표식 했다는 주장도 있다."...오마이뉴스

 

201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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