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금산군

금산...천태산 신안사

임병기(선과) 2010. 4. 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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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산사를 불쑥 찾은 객을 풀을 뽑던 노스님과 보살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살가운 인사는 물론이고 멀리서왔다며 천천히 둘러보고 가라며 법당안을 가르킨다. 많은 절집에서는 금당 내부 촬영은 고사하고 심지어 야외 문화재 촬영도 금하는 곳이 많은 현실에서 고마웁기 그지없다.

 

"신안사는 금산군 제원면에 있는 천태산 산록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국사봉과 영신봉 사이에 여러 지맥이 마치 연꽃이 만개한 형국이라 하여 연화 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신안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대가 가장 이른 것으로는 신라 진평왕 5년(583년) 무염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그런데 무염선사는 신라말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01~888년)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 연대가 서로 맞지 않아 믿기 어렵다.

 

다음으로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즉 자장이 신안사 부근에 있는 충청북도 영동의 영국사(寧國寺)에서 수행하면서 이곳에 가끔 들러 머물렀는데, 주위의 경관이 빼어나므로 몸과 마음이 매우 편안하다 하여 『신안사』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 주인공이 자장이 아닌 경순왕(재위 927~935년)으로 경순왕이 왕이 되기 전 영국사에서 수학하였으며, 그때 이 절에도 가끔 들러 유숙하면서 주위의 경관과 어울려 몸과 마음이 아울러 편안하다 하여 신안사라 했다는 설화도 전한다.

 

따라서 자장율사의 창건에 대해서도 신뢰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신라 헌강왕대(재위 875~886년) 조구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1987년 극락전을 해체수리하면서 발견한 조선후기의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한편 조구선사는 인근의 보석사를 창건한 것으로도 전하고 있다.

 

이처럼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내용이 모두 달라서 정확한 창건연대를 밝히기는 어렵다. 또한 현재 절에 전하고 있는 건물과 유물도 모두 조선시대 후기의 것이어서 신안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문헌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신라말에 조구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단언할 수는 없으며, 현재의 사찰과 주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앞으로 밝혀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극락전 중정 7층탑.1~3층 옥개석과 4~7층 옥개석의 화강암 색조가 다른 것으로 미루어 최소 2기 이상 탑의 조합인지 최초부터 다른 색감의 화강암 부재를 사용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단층기단, 옥신의 체감이 미미하여 상승감이 둔해 보인다. 몸돌에는 양우주를 두었고 옥개석 물매는 얕아보인다. 옥개석에는 2단(?)의 층급 받침을 두었다. 상륜에는 보주(?)만 남아 있다.

 

 

단층기단은 민흘림으로 조성하여 옥신의 불안정해보이는 석탑에 안정감을 주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에는 선각으로 좌우대칭의 무늬를 얕게 그렸다. 하단에는 안상을 새겼다. 초층 옥신 아래에는 방형의  탑신고임를 조성하였으며, 복련을 새겼다. 

 

 

처마부는 아래의 위의 선을 추녀부로 가면서 완만한 곡선으로 약간 들어 올렸다. 이렇듯 처마부 상하면의 선을 평행하게 반곡시킨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석탑으로 추측한다.

 

 

충남 유형문화재 3호 신안사 대광전. 기단 위에 덤벙초석에 원형 기둥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도 평방이 있고, 공포를 배치하였다. 다포.팔작 이전의 건물인지 중수중에 원형이 뀌었는지 궁금하다.

 

 

신안사 극락전. 정·측면 3*3칸, 덤벙주초, 대광전 처럼 다포식 맞배지붕이다. 두리기둥에는 배흘림이 히미하며 우리 고건축의 특징인 착시 예방 목적의 안쏠림과 귀솟음이 보인다. 정면 창호는 어칸.협칸에 4분합 문을 달았는데 어칸은 빗살문, 협칸은 격자살문이다. 내부는 우물마루이며 중앙칸 후면 쪽에 내진고주를 세웠다.

 

내진주 사이에 후불벽을 구성하고 그 앞에 불단을 안치하였다.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창호. 어칸.협칸은 4분합 문이며,  어칸은 빗살문, 양협칸은 격자살문이다.

 

 

양측면에 다른 건물에서 보기 쉽지 않은 두짝 문을 달았다. 창살은 정자살이다.

 

 

심우도를 퍽 소박하게 묘사했다.

 

 

극락전 후면. 이렇게 문을 조성한 사례는 처음 접한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입상을 모셨다. 아미타삼존불로 모두 목심소조불로 지금은 최근에 개금을 하였다.

 

아미타불.후불탱

 

순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부도가 먼저 알고 배웅을 하는 듯하다.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날,  바람결에 꽃비가 내리는 날이면 꽃세상에 묻혀 나의 몸과 마음도 사찰 이름처럼 편안해지려나? 인사 여쭙고 돌아서는 나를 한참이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노스님이 문득 그리워 진다.

 

2010.04.10 

 

전통사찰정보.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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