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보성군

보성...벌교 홍교. 도마리 석교

임병기(선과) 2009. 10. 29. 08:16
728x90

 

 

 

비개인 새벽 청정한 기운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하다. 낯선 이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사람들도 정겹다. 이모습이 벌교의 본디 모습으로 믿고 싶다. 어제저녁 늦게 도착하여 묵은 모텔의 열악하고 정갈하지 못한 환경, 에어컨. 냉장고의 굉음. 식당의 불친절하고 비싸며 맛이 떨어진  벌교의 대명사 꼬막 정식에 실망을 넘어 불쾌한 기분이었었다.

 

벌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이전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읍이었다. 가까운 낙안읍성, 선암사, 보성 차밭,대원사 동선이 답사 코스였으나 지금은 문학기행의 필수 답사처로 부상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벌교를 소설속에서 가져 왔다. 

 

"벌교는 한 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 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목포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 내는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이 벌교에는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처럼 문화유산 답사가 주목적이 아니고 문학기행을 즐기는 우리님들을 위해 벌교읍 홈페이지에서 태백산맥 무대가 된 명소를 옮겨왔다.

주릿재(율어)
벌교쪽에서 석거리재를 넘기전 율어로 가는 길이 있다. 보성에서 가장 높은 존제산을 넘는 이 재를 주릿재라 하며 재 너머에 율어라는 곳이 있다.율어는 존제산을 비롯해 온통 산으로 싸여 있기 때문에 빨치산들이 해방구로 이용하는데 유리했다. (해방구의 조건:빨치산의 공격으로 불탄 지서는 지금의 제일문구사 자리 율어가 보이는쪽에 염상진의 묘가 있었다고 함. 도로공사로 이 묘가 없어졌다는데 사실 확인이 어려움)

추동저수지
벌교쪽 석거리재 중간쯤에 위치한 저수지, 토벌대등이 빨치산과 대치하던 곳 (토벌대 초소가 있었던 곳)


고읍들
벌교의 곡창지대, 벌교가 갖는 이중성중 봉건적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곳. 빨치산들이 벌교를 공격한 후 순천방면으로 후퇴할때 가급적 이곳은 피했다.(평야지대인 까닭에 밤에는 노출이 쉬었기 때문)

들몰
하대치의 아내가 이곳 출신이다.

김범우집(봉림 김병옥씨 본가)
김범우의 아버지는 지역민들에게 존경받는 유지였고 김범우의 형은 독립투사에서 인민군이 되었다. 김범우도 일제시대 학병에서 탈출하여 OSS대원이 되었다가 해방후 순천서 교사, 이후 미군 통역관에서 손승호와 함께 좌익계 신문기자를 하다가 귀향한다. 김범우의 집은 지금도 고상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횡게다리(홍교)
보물 304호, 염상진등이 유지들의 창고를 털어 굶주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주려고 곡식을 모아둔곳. 주민들에게는 전달되지 못했으나, 좌익들의 사기를 북돋우는데 큰 힘이 되었던 사건의 장소

소화다리
좌익이 우익을, 우익이 좌익을 사형 집행하던 장소, 당시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장소. 원래는 부용교라 했으나 일제가 쇼와(昭和:일본명 히로 히토 연호) 년간에 만들어졌다해서 소화다리라 격하시켰다.

서민호 야학(구 대광교회-돌교회)
서민호가 야학을 하던곳.

현부자 제각-소화의 집(박봉래 제각)
정하섭의 심부름을 부탁받은 장소이며, 정하섭과 둘만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장소

철다리
벌교에서 순천으로 가는 철교, 중도방죽이 시작하는 곳에 위치.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벌교의 주먹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결투를 벌인 장소. 중도방죽의 주인인 중도(일본인)라는 사람의 집도 근처에 있었다고 함.

중도방죽(중도방천)
중도라는 일본 사람이 몰하(신정)에서 선수에 이르기까지 4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다를 막아 만든 간척지, 부역자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준다고 약속했으나 이행치 않아 농민들의 한이 서린 역사의 현장.

역전
염상구의 주 활동무대 빨치산들의 시체가 효시되었으며 후에 염상진의 시체가 효시되었던 장소

정미소-박공장(부영아파트)

소설속의 현부자집 제각이라는 곳은 실제 정미소 사장이였던 박봉래씨의 소유이다. 물론 소설속의 정미소는 박봉래씨의 소유는 아니다.

솥공장(대창기계)
유지의 집. 염상구가 솥공장 딸과 강제로 결혼하여 솥공장의 주인이 됨.

남원장-금산관, 대영관
남원장은 고급 요정으로 벌교 유지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 금산관과 대영관 으로 이루어져 있음.

정도가네(국일식당 부근)
소화의 애인 정하섭의 집이고 아버지는 벌교유지임.

북초등학교(벌교여중)
여순사건 당시 빨치산 및 좌익분자를 수용했던 곳

청년단(진성상사)
벌교읍사무소 뒤 체육공원 입구 2층건물이다. 원래는 일본식 2층 건물이였으나 현재는 양옥 2층 건물이다(염상구가 청년단장을 역임했다)

M1고지(체육공원)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자신이 좋아하는 M1소총의 이름을 빌어 만든 고지. 조선시대 봉화가 있었던 장소이며, 일제때는 신사가 있었던 장소.

자애병원(벌교어린이집)
자애병원 원장은 좌익, 우익을 가리지 않고 아픈 사람으로 성심껏 치료해 주는 인본주의자

금융조합(농촌지도소)
식산은행과 더불어 벌교의 금융기관
식산은행(한국통신)
벌교의 금융기관

경찰서(세운장)
소화나 들몰댁 등 많은 좌익 혐의자들이 고문을 받았던 곳. 당시 관할 지역 이 낙안, 송광, 외서, 이읍, 조성, 대서, 남양, 동강까지 였다고함. 이후 1군1 서 정책으로 벌교 경찰서는 폐쇄됨.

석거리재
벌교에서 광주를 갈 때 넘는 고개, 고개너머 기구한 운명의 여인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의 친정 외서가 있다.

뱀골재
벌교에서 고흥을 넘는 고개로 국민보도연맹에 속한 80여명을 학살한 현장. 현재 공동묘지가 있다.

진트재굴
벌교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굴, 빨치산들이 군수물자를 노리고 보급 투쟁(보투)을 감행하던 곳

용연사
빨치산의 접선 장소  

 

홍교 아래 용의 아들 '공하'가 먼저 반긴다. 물을 통해 접근하는 사악한 잡귀를 막아주는 상징을 가지며 선암사 승선교를 비롯 홍교에 조성된다. 예전에는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했는데 고증을 거쳐 복원하면 벌교의 또다른 볼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벌교홍교. 벌교筏橋지명의 유래가 된 뗏목다리가 있었던 자리에 영조(英祖) 5년(1729) 선암사(仙岩寺)의 초안선사(楚安禪師)에 의하여 석교로 건립되었다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하니 벌교민들에게 홍교는 생명체이며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홍교는 승선교 처럼 조선시대에 천장가구인 이른바 궁륭형穹隆形 구조로 무지개 모양으로 석재를 맞추고 사이사이에 방형 면석을 쌓았다. 그 위에 멍엣돌을 걸쳐 돌출시키고 난간석과  판석을 깔았다. 홍예와 공하를 제외하고는 복원한 모습이다.

 

월천공덕越川功德. 월천공덕이라고 했다. 속세의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또는 공덕을 쌓기 위해 울 조상들은 개울에 정성들여 돌다리를 놓았다.  선암사 스님들도 해마다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는 민초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 지켜보던 스님은 팔을 걷고 공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다리를 외형상의 연결 의미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로도 여겼다.  그러기에 다리는 만남과 이어짐 뿐만 아니라  생사를 초월한 시공을 넘나더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도마다리

 

홍교에서 주민들에게 도마교의 위치를 물었지만 위치는 고사하고 의사소통마져 힘들었다. 내가 어제 저녁 율어에서 밤에 내려오면서 변전소 근처에서 안내문을 보았다고 말씀드리자 그제서야 도맷다리라며 정확한 소재지를 알려주었다.

 

독(돌)다리, 도맷다리, 도마다리로 불려지는 도마교는 가까이 있는 부용산이 약마부정躍馬浮定(도약하려는 말의 자세)의 형세란 속칭에 기인하여, 도마逃馬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옛날에는 사람은 물론 물자의 이동이 빈번한 주요한 간선도로에 위치한 교량이었겠지만 지금은 교량의 기능은 다한듯 하다. 

 

 

도마교비와 중수비. 비문에 의하면 인조 25년(1645) 현지(낙안군 고읍면) 읍인 정창락·장선용 등에 의해 처음 설치되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도마교는 벌교읍 전동리의 벌교와 광주간 도로에서 100여m 정도 초지마을 쪽으로 떨어진 전동제 저수지의 물 길상에 위치하면서 초지들과 편촌들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숙종 8년(1682) 중수한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기록이 거의 없어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본래의 다리 길이는 약 5.7m에 이르는 것이었으나 1989년 여름 홍수로 절반정도가 파손되어 부재들이 유실되고 9개의 부재로 결구된 반정도만 남아 있다. 이곳에 사용된 재료는 낙안산 백석재(화강암)이며 거칠게 다듬은 각석재를 이용하여 결구시킨 지극히 원초적인 가구식 구조(Post Linrel Structure)이다.

 

이 다리는 농사일은 물론 20여년 전까지 마을 동제의 의식대상 일부였으나 마을의 전통적인 공동체 해체와 함께 그 의식들은 사라지고 농사일을 돕는 다리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전동제 저수지 공사에 따라 수로를 확장 개조시켜 도마교 입구의 수로형식이 곡자형으로 빚어져 홍수가 나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주민들은 다리의 파손이 마을의 불행을 야기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리는 원형이 파손되고 잔존원구만 남아 있지만 각석재를 결구시킨 원초적인 가구식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나 창설 중수의 절대 연대를 알려 주는 기록이 담긴 비석이 함께 있어 석조교량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6년 북한 신문의 보도로 알게된 안성현의 죽음. 이전까지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엄마야누나야" 작곡가. 월북 음악가였다. 당시 우리 카페에도 구경꾼님이 음악과 사연을 올렸던 올렸던 "부용산"  그 부용산이 도마다리 근처 였다. 그 때 올렸던 안치환이 노래한 부용산을 다시 들어보자. 사상과 이념과는 아무른 관계가 없는 애절하고 아름다운 노래 부용산 노래 사연은 벌교읍 홈에서 옮겨왔다.

 

 

부용산 노래 내력
벌교인들의 마음속에 가슴절이며 애절하게 불리워졌고, 호남인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전설처럼 입으로 입으로 불리워 졌으며 "엄마야 누나야"로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의 작곡가 안성현씨가 가족을 데리고 월북을 하고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이념이나 사상과 무관한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던 "부용산오리길"  부용산 노래가 벌교인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오다가 마침내 반세기가 조금 지난 이제 벌교인들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박기동 시인은 누이동생의 짧은 생애가 애달퍼 벌교사람들이 『절산』이라 부르는 부용산 자락에 누이를 묻고 돌아오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는 누이동생이 안쓰러워 가슴을 저미며 이 시를 쓴것이며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표현은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고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박기동 시인의 사랑하는 누이동생(박영애)의 무덤은 지금도 부용산 산자락에 고요히 묻혀 있습니다.


이 시에 곡을 붙이게 된 사연은--
박기동 시인이 목포 항도여중 재직중, 문학도였던 제자 김정희(항도여중3)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합니다.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던중 동료교사였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 선생이 써 놓은 시를 보고 여기에 곡을 붙혀 "부용산" 노래가 완성되었다 합니다. 부용산 오리길 산자락에 벌교를 바라보면서 묻혀있는 어여쁜 누이동생은 이제 벌교에서 부용산 노래가 피어남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벌교의 노래로서 또한 호남의 노래로서 전국에 이 노래가 많이 불려지길 바랄뿐입니다.

부용산 노래가사 1절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절
그리움 강이 되어
내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009.07.29 

728x90
728x90

'전라남도 > 보성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성...봉릉리 인왕상  (0) 2009.10.31
보성...우천리 삼층탑  (0) 2009.10.30
보성...유신리 마애여래좌상  (0) 2009.10.28
보성...계산리 삼층탑  (0) 2009.10.27
보성...벽옥산 옥마리 오층탑  (0) 2009.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