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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문화유산 답사회 조현두님의 글을 가져왔다.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1544~1625)을 모신 서원이다. 동으로 문수산과 청량산, 남으로 학가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마을 산자락 끝에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토석담장을 돌린 장방형 일곽 안에 양졸당·의산서당·내삼문·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건물은 조금씩 비켜 앉아 있다. 의산서원 좌측에는 계림군(鷄林君) 이흥상(李興商)과 성오당 이개립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사인 석종재(石宗齋)가 있다.
1610년(광해군 2) 마을 사림들이 “우리가 사는 곳은 향교도 멀고 하여 여기에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고 군수 강인(姜絪)에게 도움을 청해 고을 서쪽 20리 떨어진 의산의 행의사지(行依寺止) 옛터에 의산서당을 창건하였다. 동으로 문수산과 청량산, 남으로 학가산이 달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원근의 선비들이 함께 모여 낙성 모임을 갖고 곡식 약간을 거두어 선비를 양성하는 기금으로 삼았다.
양졸당
의산서당
이개립(李介立). 경주인 국당공파 26세 수(壽) 80세 24세 부호군(副護軍) 선동(善童)의 손자(孫子)이다. 명종(明宗) 원년(元年) 병오(丙午) 1546년 8월 12일생이며 인조(仁祖) 3년 을축(乙丑) 1625년 9월 20일 졸(卒)했다. 1546(명종 1)∼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성오대(省吾臺)·역봉(#역10峰). 어모장군(禦侮將軍) 준(竣)의 아들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진사인 그는 1586년(선조 19)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퇴하고, 1591년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러한 공에 의하여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이 천거된 중에 그도 포함되어 1594년에 자여찰방(自如察訪)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낭천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사감을 품자 고향에 돌아가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을 지었다.
사당
기실 오늘 답사 목적은 의산서원의 석탑이었다. 조현두(진실하고 당당하게)님이 소지한 2002년 발간 문화유산 분포자료에도 사진으로도 분명 표현되어 있었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서원 구석구석 수색중 탑신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사당 계단 입구에서 찿았지만 예전 자료의 석탑재는 아니었다.
자료사진 석탑 상륜에 얹혀있던 부재이다. 이로 미루어 2002년 이후 의산서원 복원 전후에 도난 또는 이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현두님은 종친회를 비롯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끝네 행방을 알지 못했다.
행의사 절터는 폐사되고 서원으로 바뀌었더라도 석탑이 그냥 보호되었다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을텐데 아쉬움을 금할길 없이 착찹했다.
계림군(鷄林君) 이흥상(李興商)과 성오당 이개립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사인 석종재(石宗齋)
2009.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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