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읍내에서 맛난 집으로 알려진 삼양식당을 찾았건만 문을 닫았다 이래저래 맛과는 친해질 수 없는 거렁뱅이 입인 모양이다. 그래도 흐름한 식당에서 막걸리 한 순배와 먹은 비빔밥의 맛을 잊을 수 없다. 그사이에도 영양에서 숲해설사로 근무하는 종화님은 빨리 오지 않는다고 재촉이 이어진다.
용화리로 미루어 옛절터임을 이해되는 고추밭에 석탑은 홀로 서 있었다. 석탑은 폐사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월광산 민족 자산의 수탈과, 우리 민중의 착취현장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지독한 아픔에서 벗어나도 좋으련만 파리한 자태이다.
적막한 분위기의 용화리 석탑이 자연과 어깨동무하고 사람과 어울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자주 찾아야한다. 슬픈 역사의 치유책은 우리의 몫임을 한시도 잊지말자.
용화동 삼층 석탑. 2기단, 상기단에는 탱주와 양우주가 보인다. 몸돌에는 양우주, 옥개 낙수면은 완만하고, 받침은 1.2층 4단.3층 3단이다. 상기단 갑석 모서리가 깨어졌으며 상륜은 멸실되었다. 모서리의 반전은 희미하다. 통일신라 후기 탑으로 알려져 있다.
용화사(龍化寺)는 고려시대 사찰로서 당시에 는 영양군 북부의 큰 사찰이었다고 전하며 조선 중엽 이전에 폐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용화사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모두가 뜻을 이루어서 하늘로 올라 갔다 하여 이 곳에 용화사 절을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곳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의 이름을 용화라고 하게 되었다."
용화리 삼층석탑 옆에는 폐광산을 활용하여 야생화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폐광에 대한 자료를 영양군청 홈에서 옮겨오니 답사길에 참조하길 바란다.
"1945년 8월 15일은 일월산에도 벅찬 감격이 흘러 넘쳤을 것이리라. 온 산을 헤집어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지긋지긋한 일제(日帝) 수탈의 곡괭이질이 멈춘 때문인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이용하며 구사한 광물수탈 전략은 통감부시 대에 접어든 이듬해인 1906년 7월 광업법 및 사금채취법 발표에서 시작된다.
일제는 1915년 조선광업법을 제정, 한반도 전체 무연탄ㆍ흑연ㆍ아연ㆍ몰리브덴광 등을 일본 재벌들이 독점토록 했다. 금ㆍ은광도 대분인 일인들이 차지했다. 조선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20년 한국내 광산중 일본인 소유는 80%가 넘었던 반면 한국인은 고작 0.3%에 불과 했다. 아예 통째 삼켜 버린 것이다. 일월산은 이런 불행한 수탈사의 궤적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생채기를 입어 영산의 정기와 자원을 적잖게 잃어버렸다.
영양군 일월산면사무소 화단 한켠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엄청 큰 물레방아 돌절구가 놓여있다. 어른 가슴팍 만한 높이에 둘레가 4m나 된다. 일월면 용화리 호박 골에 고려시대때 창건했다는(지금 소실됨) 용화사에서 절밥 곡식을 찧으려 만든 것이라 한다. 일월산 광산을 운영하러 왔던 일인들이 그런 희귀한 물건을 가만둘리 없었다. 본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일월산광산 용화제련소 앞마당에 옮겨다 두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반출직전 해방을 맞아 이 돌절구는 일월산의 또 하나의 얘깃거리를 전해주는 소품으로 남게됐다. 일인들은 닥치는 대로, 정말 별것을 다 가져가려 했다. 면의 상징물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지난 92년 면사무소로 옮겨와 잘 관리하고 있다. 일인들이 돌절구를 가져다 놓았던 일월면 용화리 아랫대티 초입의 일원광산 용화제련소는 일제가 영양ㆍ봉화 일대 일월산 수탈에 나서 파헤집은 30여개 광산의 광물 대부분을 제련하던 곳이다.
규모만도 가로 30m, 세로 80m에 이른다. 위쪽으로부터 대ㆍ중ㆍ소 쇄석기가 설치되고 돌과 광물을 분류하는 마광기, 광물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부선기, 용광로 등 이 13단계(층)로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납과 아연을 취급했다. 대규모 경사형 콘크리트 선광시설 꼭대기에는 채광된 광석들을 이용하는데 사용했던 높이 2m의 수평굴과 수직굴이 있고 제련시설안은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폐광물이 쌓여 있다.
제련시설 위쪽과 좌ㆍ우측에도 광미 등 폐기물이 폭 15m, 높이 10m이상으로 쌓여 금세라도 쏟아져 인근 민가를 덮칠 기세다. 제련소 앞 수만평의 광미(鑛微)야적 장에는 깊이 5m이상으로 폐기물이 쌓여 비만 오면 배어 나오는 시뻘건 폐수가 낙동강 상류 장군천(반변천의 본류)으로 흘러들어 하류 1㎞지점까지 바위와 자갈돌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일제 수탈에 이리저리 채이고 헤집힌 민족의 산과 민초들의 피멍 같다.
일제의 일월산 광물 수탈은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일본인 나카가와 다로 오(中川太郞ㆍ당시 63세)가 일월산 일대에 구리광맥을 발견, 채굴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그해 가을 간이제련시설이 갖춰질 무렵 일월산 일대 30여개 광산업무를 관장하는 일월광산 채광사무소가 설치되고 본국에서 파견된 시마모리 히로시(島森 浩ㆍ당시 60세)가 소장으로 취임해 광물생산의 고삐를 조였다. 당시 일월광산 채광사무소는 제련소와 분석계, 공자계, 채광계, 변전소, 경비계 등으로 편제돼 일본인 기술자와 사무직 50여명이 상주했다고 한다.
해방직전 안동 예안면에서 이곳에와 3년 동안 광산사무실 급사로 일했다는 이홍영 (72ㆍ일월면 문암리) 옹은 『선녀탕 계곡 맞은편에 채광사무실이 있었고 최씨로 기억되는 한국인 노무주임 1명 이외는 모두가 일본인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제련소와 사무실이 건축된 이듬해 1939년 여름부터 일월산 주변 광산의 구리ㆍ아 연 채굴이 본격화된다. 주요 갱은 선녀탕 입구와 장군골, 병풍골을 따라 집중돼 있다. 선녀탕 입구 본 갱은 길이가 무려 500m에 이르고 이를 축으로 거미줄 같은 소갱구와 100m 아래로 난 수직갱이 연결된다. 1940년 초에는 제련소 부선시설이 완공되고 영월화력발전소로부터 전기가 공급되면서 하루동안 채굴되는 광석만해도 140t, 해방 때까지 총량은 무려 100만t에 이르렀다. 하루70t을 처리할 수 있는 부선시설이 쉴새없이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대구지방환경관리청이 지난 98년 조사해 발표한 일월광산 오염실태 보고서 자료에서는 당시 용화 제련소에서 정광된 광물만도 금과 은 각 1t, 구리 800t, 납 1천40 0t, 아연 1천800t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채굴이 한창이던 40년대 초반 이일대 장군골과 큰거리 등에는 250여호의 산막들이 들어서 인근 안동과 봉화, 영주 등지에서 징용된 400여명의 광부들이 기거했다. 장군골 입구에는 당시 이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던 초소였던 일본식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민초들은 새벽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월산 골골 갱구와 제련시설로 흩어져 채굴과 광물수송 등짐질로 초죽음이 됐다. 이옹은 '그당시 한인 광부들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맨몸으로 갱굴에 들어가 발 을 헛디뎌 떨어지거나 바위에 깔려 목숨을 잃는 사고가 빈번했으나 변변한 보상과 장례조차 없었고 노임이라야 보리쌀과 감자 몇 개가 고작이었다'며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영양군은 수십년 동안 각종 중금속으로 오염된 채 방치돼 있던 폐광산 일대를 야생화 공원으로 조성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공원에는 주변에 자생하던 금낭화·구절초·벌개미취·원추리 등 야생화 62종 10만9천여 포기와 하늘말나리 등 점차 사라져가는 희귀 야생화 및 느티나무와 화살나무 등 조경수 1만1천여 그루와 꽃창포·붓꽃 등의 습지식물 관찰단지, 인공 연못, 수로 등이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조지훈 시인의 ‘승무’ 시비도 눈에 들어왔지만 일제강점기의 일제가 행한 수탈, 핍박의 희생양이 되었던 민초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파노라마가 되어 눈앞을 스쳐가고, 하늘에는 구름이 나를 위무하듯 흘러가고 있었다.
2009.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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