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천안시

천안...삼태리 마애불

임병기(선과) 2009. 3. 24.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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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사

 

이른 아침 집을 나와 천안 삼태리 마애불로 향했다. 이시간 이면 대부분 공원 관리소 문을 개방하지 않을 텐데 태화산 자영휴양림 입구에는 연륜이 쌓인 어르신이 하차를 강요하신다.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드리고 양해를 구하였더니 차량 출입 허락을 해주셨다.

 

사찰 입구. 마애불은 보이지 않고 두 절집이 나란히 객을 반긴다. 어디로 향할까? 작은 마애불 표시가 있는 사찰이 태고종 태학사이다. 

 

"태학사는 신라 흥덕왕 때 진산선사가 해선암 이란 이름으로 창건했으나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던 곳을 1930년에 중건했다. 태학사를 중건한 법랍 이병희는 우연히 기도 차 이곳에 들렀다가 마애불(천원 삼태리 마애불 보물 제407호)을 보고 불심이 생겨 출가를 결심했고. 그 후 공주 마곡사에서 수계하고 광덕사에 토불을 옮겨 옛해선암 터 아래 절을 세웠고 그것이 1959년에 태학사로 자리를 잡으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법왕사

 

옆에 나란히 한 조계종 법왕사 역시 시대를 거슬러 고려 공민왕 시절 해선암 자리에 창건했다고 하며 천연동굴속에 마애석불을 봉안하였다고 했지만, 미쳐 준비되지 않은 답사길이라 직접 인연 짓지 못하였다. 답사의 주목적이 삼태리 마애불이지만 두 절집을 바라보며 가슴 아래 흥건히 고인 서러움의 정체를 모르겠다. 

 

 

태학사 산신각 아래에 두 분의 석인(?)상이 흥미를 유발한다. 우측분은 두건을 착용하여 지장보살로도 보이며 앞에 분 역시 지장보살 추측된다. 홀을 들지 않아 묘소앞의 문무인석은 아닌듯 하지만 여쭐 사람 없음이 더 애닲펐다.

 

 

산신각 옆 무너진 탑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의 무게인지 알지못할(?) 집단의 희생양인지 말이없다.

 

 

일견 고려탑으로 보인다.

 

삼태리 마애불

 

문화재청 자료를 옮겨왔다."얼굴 부분은 도드라지게 조각하고 신체는 선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이는 고려 후기 마애불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민머리 위에는 둥근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살이 올라있는 넓적한 얼굴은 가는 눈·커다란 코·작은 입으로 인해 더욱 경직된 인상을 풍긴다. 목은 짧아서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이며 이로 인하여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어깨는 넓기만 할 뿐 양감이 없으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하게 처리하였다. 상체와 양쪽 옷자락에는 세로선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하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겼는데, 옷주름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어 도식화된 면을 엿볼 수 있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왼손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유행하던 미륵불상의 손모양으로 이 불상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지명의 유래도 궁금했었다. 3개의 큰 자랑거리로 지레 짐작한 단순 무식의 줄거움을 알기에..., 삼태리는 고려시대 세분의 정승을 배출하여 유래하였다는 설과 지형이 삼태기라는 형국론이 있다고 한다.

 

그럼, 저 큰바위 얼굴(불상)은 세분 정승중의 한 분일까?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력과 공덕을 갖추어야 가능하기에 민초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불사일 것이다.  정승 집안 후손들이 또다른 염원으로 조성에 관여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전혀 근거없는 나만의 주장 입니다) 

 

민초들은 메시아로 믿고 예배하였겠지만...

 

200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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