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고령군

대가야...대가야 박물관 야외전시장

임병기(선과) 2009. 1. 12. 11:30
728x90

 

 

 

스쳐지나기만 여러번 대가야박물관은 들리지 못했다. 준공전에도 왕릉전시관, 가야고분 등 고령 지역을 거의 섭렵했지만 박물관은 첫 걸음이다. 이번에도 몇일전 연조공원의 석조문화재 답사차 들렸다가 행방이 묘연한 문화재를 수소문하여 발걸음 하였다.

 

여타 박물관 야외 전시장도 오십보백보지만 전시물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 시대만 표시 했지 어떤 특징에 의해 분류했는지, 두리뭉실하게 통일신라로 하지말고 최소한 몇세기전후반 까지 명시해야하지 않았을까?

 

 

통일신라 석탑. 세기를 잡아 보았다.

 

 

통일신라 석탑. 설명 전문이다. 최근에는 문화재를 바라보는 식견들이 아마추어들도 녹록치 않은 수준이다. 최소한 기단 탱주의 수, 옥개받침의 약화, 탑 크기의 축소. 등등으로 인해 전성기를 지난 9세기(추측) 탑으로 보인다. 라고 안내했으면 좋을텐데.

 

 

비로자나불로 보이는 여래상이  몸돌에 새겨진 탑. 이 탑도 시대적 분류 이전에 몸돌 사방불의 등장 배경, 상징성 등을 안내문에 명기해야 한다. 탑 안내문도 없었지만...

 

 

첫번째 사진 탑과 닮았으며 동시대 석탑으로 보인다.

 

 

뒤죽박죽?

 

 

고려시대 석탑으로 안내문에 표시되어 있다. 하기단 복련, 팔각 원당형 간주석,  상기단에는 앙련과 별석 처럼 보이는 화사석 받침이 한 돌이다. 내눈에는 4각 화사석으로 인해 고려 시대로 분류된 것 같다.

 

 

석등 부재

 

 

석등부재, 석탑, 석불 묘하게도 전시된 기수가 4기로 동일하다.

 

온갖 억측이 일어나지만 잡념이다!!!

 

 

우에서 내려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실제로는 화사석에 비해 간주석이 너무 길어 뻘쭘한 모습이다.

혹 보았는가? 봄날 가로수를 전지하는 인부들이 마구잡이로 잘라내고 꼭대기부분만 남겨 놓아 잎이 정상부분에만 솟아난 가로수를 상상해보라.

 

 

왕릉전시관, 왕릉으로 향하는 길목에 시립하고 있는 문인석.

 

 

서글프다. 누구의 소행일까?

 

석불은 오랫만에 한파가 엄습한 겨울이지만 따뜻한 자리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은 듯 무념무상의 표정이다. 얼굴이 멸실된 다른 석불의 가슴도 그러하겠지.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

 

이목구비는 민초들의 기자신앙에 내어주었지만 엷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주형거신광배에는 불꽃문을 새겼다.

 

 

왼손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불인지 항마촉지인의 석가여래인지 분명하지 않다.

 

역시 주형 광배가 남아 있다.

 

 

좌측은 지권인 수인으로 보이며, 오른쪽은 분명하지 않다.

 

 

4기중 비로자나불상이 두 분이다.가야산 자락을 둘러싼. 김천 수도암 비로자나, 성주 금봉리 비로자나, 성주 심원사지 삼존불이 새겨진 광배, 해인사 비로자나불과 연결해보면 어떨까? 지역적으로 동지역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소설은 소설로 즐겨주길 바란다.

 

 

 

비신과 이수가 멸실된 귀부. 부도비였겠지?

 

야외전시장 석탑, 석등, 석불은 2004년에 만난 후 5년만에 다시 해후했다. 예나지금이나 현실이 안타깝지만 이제나마 제자리로 온 듯하여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박물관과 왕릉 개실마을 체험코스 등 고령군청이 전개하는 관광행정은 지자체 중에서도 으뜸이지만 군지역에 다양하게 분포한  비지정 성혈, 대평리 석불입상 이정표 미비, 군청 관광홈페지의 충실화를 기대해본다. 이러한 작은 정책은 단체 관광객의 코스를 피하여 소수로 이동하는 답사 매니아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박물관 실내전시관에는 지난번에 언급한 반룡사가 안태 고향인 조선 동종과 고려초 다층석탑에 대한 설명은 피하겠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길 빈다.

 

조선 동종 

다층석탑

 

2009.01.02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