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스크랩] 서라벌...선도산 마애불

임병기(선과) 2008. 12. 2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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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 석탑

 

신라인들의 극락정토 선도산 초입의 석탑. 진지왕릉, 헌안왕릉, 그리고 이름 모를 고분과 민묘의 외호막이 처럼 보인다. 그들을 지켜낼 힘이 소진되었을 텐데 여전히 뽀얀 자태로 사악한 무리의 접근을 봉쇄하고 있다.

 

초겨울이건만. 오늘은 봄날의 햇볕이다. 외피를 벗고 석탑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많은 역사속의 인물이 스쳐가건만 붙잡히지 않는다. 나들이 온 백발의 노부부가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젊은이가 대견스럽다고 했을까? 마음과 달리 다리가 저려온다. 바보 멍청이!!!

 

 

모전석탑? 낙수면의 층급, 인왕상, 높은 단층기단 등 모전석탑의 특징도 보이지만 그냥 삼층탑으로 부르고 싶다. 서악리 석탑 앞에서면 유년의 내고향 부억옆 장독대에 거꾸로 붙였던 버선모양의 하얀 그림이 떠오른다.

 

질 좋은 간장을 얻기위해 불결한 요소를 방지한다는 상징이지만 하얀 버선이 뒤집혀 걸린 까닭은 뭘까? 어느 민속학자는 버선을 거꾸로 하는 것은 여인의 옷이 흘러 내려 뽀얀 종아리살에 잡귀가 놀라 도망간다고 해석했지만 힌색은 밝음을 의미하여 벽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서악리 탑도 선도산을 지키는 그런 상징적인 탑일까? 뽀~~얀 모습에 횡설수설......

 

선도산 마애삼존불

 

신라인의 극락정토, 선도산이다. 그러니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이 계신다. 바위는 질좋은 화강암이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안산암이라 상처가 심하다. 불교가 공인되기전 신라사람들은 삼산오악(三山五嶽)신앙에 따라  성모사를 세워 서악의 산신으로 성모를 섬겼다고 알려져 있다.

 

성모사와 불상. 불교 공인 이전 신라인의 경배 대상인 산신(성모)과 불교의 습합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화, 정치의 흐름과 선도산 마애불의 조성과 관련해서는 자료가 넘쳐나지만 토속신앙과 불교의 전파 과정으로 생각 하면 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찰 창건 설화와 나쁜 용의 설정 등의 범주로 보면 좋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단순하고, 편리하게 해석하고 소프트 터치가 좋다. 머리가 굳은 것인지 외골수가 된건지 판단하기도 싫다. 어느 미술 사학자가 말했다. "마애불은 조성한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계시든 불상이 걸어 나온 것"이라고... 문득 선도산 아미타불에서 그런 느낌이 강하게 전해온다.

 

아미타불

 

안산암에 아미타불을 조성한 장인은 누구 였을까?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을까? 불상보다 더 존경받아야 온당한 대접이리라. 장인의 지극한 정성과 신기도 세월의 무게는 피할 수 없어 얼굴과 신체는 상처가 심하다.

 

눈위의 얼굴과 머리는 서라벌 민중들에게 돌려주고,  코,  입만 남아 있다.불신은 양감없이 수인은 시무외인, 여원인의 통인이다. 법의는 통견이며 U자형의 옷주름이  보인다.

 

연화대좌

 

관음보살

 

보관의 화불과 왼손의 정병으로 미루어 아미타불의 협시불인 관음보살이 분명하다. 갸름한 얼굴, 약간의 살이 찐 모습이 복스럽다.

 

대세지보살

 

과거의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다.  5분열 된 불신을 봉합(?)하였지만 끝내 왼족팔은 찾지 못했다. 직사각형 얼굴은 관음보살 처럼 복스럽다. 삼도가 보이며 법의도 비슷한 대세지 보살이다.

 

 

협시보살의 복련대좌는 원통형 돌의 전면만 파서 불신을 삽입한 흔치 않은 모습이다.

 

성모사

 

 연로하신 노보살은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면서 콩을 삶고 있었다.

 

-.보살님 성모사 문 좀 열어주시면 안될까요?

-.성씨가 뭐요?

-.임가 입니다.

-.그러면 안돼!! 박씨들만 열 수 있어!!

 

선도산성모설화...출처 http://kr.blog.yahoo.com/kjchuel/2392

경주의 서산 선도산성모가 불사(佛事)를 도와준 감응(感應)의 이적에 관한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感通篇)에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절)의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의 자리 밑을 파 보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
고 하였다.


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
신령스러운 일 중에는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다른 일로는 선도산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신라 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 등의 지명도 닭은 원래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이 일찍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를 접대한 왕보(王)는 김부식에게 우신관(佑神館)에 모셔 놓은 여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알겠는가?고 묻자, 김부식이 대답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서연산에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고, 천제녀(天帝女)를 불러 신선의 옷을 짰도다, 장생술(長生術)도 영이함이 없지 않았는데, 부처를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도다(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이 설화에서는 고대의 산신 신앙(山神信仰)에 불교 사상과 신선 사상이 모순 없이 융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불교신문에 기고한 이도흠님의 글이 맘에 와 닿는다. "원융미의 정점에 석굴암 본존불이 있고, 질박미의 정수가 부처골 감실 부처상이라면, 신심과 예술혼의 정화가 바로 이 불상이라는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장인은 돌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솟을 때마다 자신의 신심이 부족함을 탓하며 더욱 지극 정성을 다하여 불상을 새겼을 것이다.

 

장인이 정질을 하는 동안 아마 이 바위 아래에서 장인의 아내는 매일 삼천 배를 드리지 않았을까. 현재의 모습만 보고 미술가들이나 불자들이나 이 마애불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예술혼이 부족한 예술가들, 신심이 부족한 신자들은 당연히 이곳에 와서 영감을 얻고 신심을 다시 일으켜야 하리라.

 

아니, 적당주의에 빠진 한국인 대다수가 이곳에 와서 장인을 떠올리며 통렬하게 자신을 성찰하여야 한다. 결국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불상이 서자 이곳은 공히 정토가 되었다. 이 산자락에 그리 고분이 많은 것도 신라인들이 이곳을 극락정토로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켜온 서라벌

 

 

서악리 고분. 마냥 바라보고 싶다. 무덤. 무덤이잖아?

그런데

나는. 우리는 왜 매료되나?

 

 

나는

지금 내려오는 길인가? 들어가는 길인가?

 

그참. 알수 없구먼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2008.11.2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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