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거창군

[스크랩] 거창...갈계리 임씨 고가

임병기(선과) 2008. 10. 21. 07:58
728x90

 

거창읍내에서 갈계리 가는 길에 지친 마누라는 수승대 근처 동료들이 모인 장소에 하차시키고 아주 자유롭게(?) 은진 임씨 고택으로 향했다. 오늘 따라 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행사로 시골 마을이 복잡했다. 

 

임씨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葛川) 임훈(林薰)선생이 거처했던  가옥으로 중종2년(1507)에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고가는 호음산과 시루봉사이 계곡에 갈계리 자리하며, 솟을대문이 딸린 문간채, 선생의 호 자이당이 당호인 사랑채, 안채, 좌우 장판각과 사당, 담장 너머 서간소루로 배치되어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에서 바라본 솟을대문. 

 

정면3칸, 측면1칸이며 특이하게 신방석이 용머리이다.

 

용두는 집안의 복과 안녕을 빌고 화재 등의 재앙을 쫓는 벽사의 의미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정려문

 

[孝子行典牲署參奉 林薰之門 明廟甲子命旌 後積仕至掌隸院判決事 贈 吏曹判書 諡 孝簡公]이란 현판이 이채로웠다. 내용은 {전생서참봉 벼슬을 지낸 효자 임훈의 집. 명종 갑자년(1564)에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후에 여러번 벼슬하여  그 벼슬이 장예원판결사에 이르렀다.

 

갈천 임훈 선생과 첨모당 임운 선생에 대한 글을 가져온다.

 

선생은 1500년(연산 6년) 7월 15일 진사(進士) 석천공(石泉公·得蕃)과 진양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중성(仲成)이며 스스로 자이당(自怡堂)이라 호를 지었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삼형제 중 맏이로 도계(道溪) 영(英), 첨모당(瞻慕堂) 운(芸)이 아우이다. 도계공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첨모당은 갈천과 생전에 정려를 받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덕행 또한 출중하였다.


갈계리 은진(恩津) 임씨(林氏)들은 갈천의 증조부인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낸 千年(천년)공이 처음 들어왔다 한다. 지금 이 곳에는 삼형제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마을 전체 140가구중 100가구 정도 된다고 한다.  
선생이 18세때 당시 경상감사로 온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만나 보고 크게 성공할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모재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당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시문에 능했으며,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인물이다.


갈천은 27세때 모친상을 당하자 아우들과 삼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41세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54세때 성균관의 추천으로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어, 2년동안 집경전(集慶殿) 제용감(濟用監) 전생서(典牲署) 참봉 등을 두루 지냈다. 참봉은 종9품 미관말직으로 당시 선생의 나이나 인품으로 보아 어울리지 않은 벼슬자리였다.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없었고, 어버이의 권장도 있었기에 바로 직무에 나아가 정성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선생의 지극한 충효정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부친의 연세 이미 팔순이 되어 벼슬자리에 더 머물 수 가 없었다. 부친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아우인 첨모당과 부친을 모시면서 봉양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했다.


선생의 문인이자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부친인 진사(進士) 정유명(鄭惟明)은 행장에 이르기를, {아우인 참봉공과 좌우에서 모시면서 봉양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기분을 화평하게 하고 뜻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소리로 귀를 즐겁게 하였으며 용모를 온순하게 하여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해드리며 효성으로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효성으로 마을과 나라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60세였다. 2년 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예를 극진히 하여 3년상을 마쳤다. 복이 끝날 즈음, 현감이 선생 형제분의 효행을 나라에 알리려 하자 사양하였다. 1564년 비로소 명종이 선생 형제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그들이 사는 마을의 거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보통당사자가 죽은 후에 시행되었다. 살아서 정려를 받기는 드문 일로 하늘이 내린 효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를 생정려(生旌閭)라 하여 더더욱 가치있게 여겼다. 갈천과 첨모당은 살아서 정려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겠다.


선생 67세때 명종이 경학(經學)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했다. 이때 전국에서 선비 6명을 선발하였는데 선생이 그 중 한분이다. 이들에게는 모두 육품직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은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언양현감으로 있어면서 마을의 6가지 폐단을 조목조목 상소하여 시정을 요구하였다. 6가지 폐단은 군역, 세금, 부채, 공물제도에 관한 것인데,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명종은 이를 보고 감사에게 전지를 내려 말하기를 『지금 언양현감 임훈의 상소내용을 보니, 자신이 親民의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의 곤란을 목격하고 내게 각조의 폐단을 말했으니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 뜻을 언양에 전하라』 하였다. 여기서 선생이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고초를 자신의 일로 여겨 바로잡은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70세에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다. 임지로 떠나기 전 선조가 불러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말하고 민생의 폐단을 구제할 것』을 힘써 말하였다. 선생은 외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고 관리를 부리는 데 이르러서는 각각 자신들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 신의로써 믿게 하였다. 73세때 아우 첨모당이 세상을 떠나자 심히 애통하게 여겼다. 또 남명 조식의 부음을 듣고 만사를 지어 보냈다. 74세때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10월에 광주목사에 제수되자 나이가 많아 사양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허락치 않아 그 직에 나아가 백성들의 공물과 부역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78세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제수받았지만 사양하였다. 이때 임금이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83세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1584년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약을 지어 전의를 보냈으나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세상을 떠난 후 2년(1586) 안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아우인 첨모당과 배향되었다. 1662년 용문서원이 사액(賜額)되었다. 1861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1871년 효간공(孝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옛 성현의 道를 좋아해, 이를 독실히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학문을 닦아 실천하니, 행동은 더욱 고결하고 덕은 더욱 닦아지게 되었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 사람에게 忠愛하고 돈후했으며, 일을 할 때 利害에 당해서는 확실한 법도가 있어 사람을 畏服시켰다. 조선조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의 글이다.


무릇 인간은 충과 효를 힘써 행하는 내실만 있다면 성현의 도를 알려 하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두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공은 담백한 자질로서 아름다운 문채를 더하여 능히 여러 老先生으로 더불어 부지런히 학문을 닦았으니,속된 학문 이외의 것에 마음을 둔 것을 알겠다. 그 조예의 얕고 깊음을 후대 사람들이 알 바 아니며, 그 취향 높은 것도 후인이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조 학자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이다.


허목과 송시열이 한 인물을 두고 평가한 글이다. 허목과 송시열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당시 우리나라 학파의 양대 축을 이끌었던 노론과 남인의 영수로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학파를 달리했던 두 거목이 한 목소리로 이처럼 칭찬해마지 않았던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이다.    
첨모당은 1517년(중종12) 거창 갈계리에서 진사(進士) 석천공(石泉公·得蕃)과 진양 강씨 사이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언성(彦成)이다. 맏형 갈천(葛川) 임훈(林薰)은 남명,퇴계의 교유인으로 당시 조야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중형 도계공(道溪公) 영(英)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첨모당은 어린시절 호탕하고 용맹한 성격으로 글 읽는 일보다 말 타고 활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무술을 권하고, 진사공도 병서를 가르치니 비로소 문리를 터득하였다 한다. 병서를 통해 문리를 터득한 첨모당은 {맹자}를 비롯한 유학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어 유학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을 다 갖추게 되었다. 이로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독서를 하고는 반드시 궁구해서 그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첨모당은 천성이 검소하여 입는 옷과 먹는 음식에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옛 성인의 [군자는 먹되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하되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학문 정진하기에도 바쁜데 먹고 입는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 다. 또한 당대 뛰어난 선비들과 어울려 산수를 유람하며 학문 정진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갈계리 서쪽에 화림동이 있는데, 산수가 빼어나 일두 정여창, 남명 조식 등을 비롯한 선현들이 들러 시를 읊조리기도 한 명승지이다. 첨모당은 일찍이 맏형 갈천을 모시고 남명(南冥), 옥계(玉溪) 노진(盧 ) ,덕계(德溪) 오건(吳健) 등 명유들과 어울려 성정(性情)을 음영하고 고금의 일을 담론하면서 자연을 완상하기도 하였다.

 

첨모당의 부모 공양과 형제 자매간의 우애는 지금까지 후대인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현재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세워진 생전에 내린 정려비가 증명하고 있다. 이 비는 1564년 명종이 갈천과 첨모당 형제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우도록 한 것이다.  


첨모당은 부모가 돌아가시기까지 곁에서 모시면서 효를 다하였다. 맏형 갈천이 조정에서 벼슬살이 할 때, 첨모당은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맏형이 집안 걱정을 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늙으신 부친을 봉양할 때 [먹이 물고 돌아오니 산은 저물고자 하네]라는 시구를 지어 자식으로서 부모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을 항상 걱정하였으며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다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제물을 손수 장만하면서 몸이 불편하여도 묘소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형제간의 우애 또한 남달랐다. 맏형인 갈천이 학문에 정진하느라 집안 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어 자주 식량이 떨어졌다. 이때 첨모당은 온 힘을 다하여 맏형을 돕다가 자신도 같이 곤궁하게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중형 도계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카들을 양육하기를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한다.


첨모당의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전해져 51세(1567년)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 되었으며 이로부터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후릉(厚陵)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 세상을 떠기전까지 무려 5차례나 직을 옮겨,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하였다. 집경전 참봉때는 전각이 기울어진 것을 알고 부윤에게 부탁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참봉은 종9품 미관말직으로 당시 선생의 나이나 인품으로 보아 어울리지 않은 벼슬자리였다.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직무에 나아가 정성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한 것이다.

 
첨모당은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주자서(朱子書) 등의 독서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하였다. 그밖에 천문 지리 의약 등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수학과 병서에는 특출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맏형 갈천과 주역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갈천이 이르기를 {사색하고 공부하는데는 비록 옛날 덕있는 사람이라도 아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만약 내 아우로 하여금 뜻을 펴서 어떤 일을 하게 하였다면 천하의 어떠한 일도 담당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고 옛날 덕있는 사람들이 힘써 했던 일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아우의 뛰어난 역량을 칭찬하였다. 또 갈천은 어떤 사람이 성리설을 물으러 오면 {내 아우가 잘 아니 그에게 물어 보라}하기도 하였다.  갈천은 동생 첨모당의 자질과 학덕을 높이 여겼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갈천의 말대로 만약 첨모당이 출사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였다면, 정사를 봄에 있어 어떤 일도 담당하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신(修身) 공부와 부모 봉양을 평생의 일로 알고 보냈으니 후대에 첨모당을 아는 사람들이 드문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학문은 요점을 아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그 요점은 敬을 주로 하는 것외는 아무것도 없다. 굳건히 스스로 지켜서 이를 잃지 않는다면 덕을 세우는 기본이 될 것이다.] 첨모당은 [敬]을 학문의 요체로 여겨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敬]공부는 안으로 마음 수양 쪽에 필요한 것으로서 예로부터 학자들이 수양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덕목이었다. 첨모당은 경을 단순히 수양을 하는 덕목으로 여겨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평생 동안 부모에게 효도하여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드러나 조정에서 정려까지 내렸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하겠다.
또한 공부를 할 때,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나 같은 사람 공부 백배나 더하여 /끝까지 신중히 하면서 게으르지 않으리/성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얻겠는가/ 세월이 오래되면 방법은 스스로 생기리] 자신을 면려하면서 공부에 꾸준히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낸 시다.


첨모당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전 아들들을 불러 놓고 {너희들은 삼가서 나쁜 일을 하지 마라. 자고로 선한 일을 하여 이롭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악한 일을 하여 해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경계의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 56세(1572)였다.


첨모당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고향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다. 참봉이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관직은 아니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신하된 도리와 맏형의 간곡한 권유로 벼슬살이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첨모당은 연은전참봉으로 있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조정에서는 영구가 고향으로 내려갈 때, 경기 충청 경상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상여를 호송토록 하였다고 한다. 첨모당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과 사림에서는 그의 학행이 아직 세상에 제대로 펴지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1996.9.27.경남일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채 자이당. 사이버에서 갈계리 고택을 검색하면 자이당을 안채로 표기한 자료가 부지기수이다. 당호는 사랑채을 지칭하는 것이지 안채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모든 자료는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원문은 거창군청 홈페이지  문화관광 안내문이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승자박? 당장이라도 거창군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싶지만 이제는 지친다.

 

일자형 사랑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대칭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쪽마루를 내었다. 재미 있는 것은 용마루 아래 눈썹기와이다. 근처 정온고택 사랑채에서도 보이는 눈썹기와는 용마루에서 생길지 모르는 누수를 방지하고 용마루를 높게 보이게 함으로서 건물에 위용을 더하려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안채

 

평야지대에 ㅡ자형 가옥배치는 흔하지만 덕유산 자락 산간지방에 위치한 임씨 고가는 ㄷ또는 ㅁ자형이 일반적일텐데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ㅡ자형이라 이채롭다.

 

특히나 좌우 건물이 없는 안채는 드물게 보며, 현재 안마당에 위치한 밭을 전부 안마당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으며 지나치게 개방적이어서 본래의 건물이 아니거나 좌우 건물이 없어진듯 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장판각.사당

 

좌측이 장판각이며 중앙이 일반적인 사당 위치와 반대에 자리한 사당이다. 장판각에는 갈천 임훈(1500~1584)과 첨모당 임운(1517~157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 177매가 보관되어 있고,두 문집은 1665년(현종 6년)에 그의 후손이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송시열이 서문을 썼다고 한다. 

"4권 2책으로 구성된 <갈천집>에는 선생이 쓴 시를 비롯하여 상소문과 잡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언양진폐소"는 선생이 언양현감으로 있을 때 고을의 어려운 실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해결을 촉구한 글로, 가혹한 세금 때문에 고통 받는 농민의 생활상을 호소하고 있어 당시 언양 지역의 사회 실정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3권 2책으로 구성된 <첨모당 문집>역시 시와 문장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으며, 특히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글을 실어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을 잘 전해주고 있다. 두 문집에는 또한 지역 사회에 관한 글들이 다수 실려 있어, 거창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문화재청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서간소루

 

고택 좌측에 위치한 서간소루는 첨모당 임운 선생이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서간 임승신 선생이 덕행과 학문을 닦던 곳으로 대문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더위를 피하며 고택을 답사할 수 있는 천혜의 위치에 입지 했지만, 시장터를 방불케하는 피서객과, 야릇한 영화제로 인해 여름날 답사는 포기해야 한다.

 

백제와 신라의 향기가 묻어 있고 퇴계와 신권 선생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오는 수승대의 가을 정취를 즐기며 정온 고택과 더불어 하루 답사길로 추천하고 싶다. 

 

농산리 불상, 갈계리 석탑, 가섭암지 마애불 등 불교 문화유산도  당연히 동선에 포함해야겠지만, 언제쯤이면 거창군청 홈페이지 설명 오류가 수정될런지...

 

2008.08.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