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익산시

[스크랩] 익산...왕궁리 5층탑

임병기(선과) 2008. 8. 5.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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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분위기를 훼손한 대표적인 탑이다.

 

전시관도 그러하고 마구 발굴되어 정리되지 않은 현장도 서글프고...

 

발굴이 끝난 후 다시 찾아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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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자료를 보자. "우선 첫인상으로 보면 이 탑은 백제탑의 인상을 짙게 풍긴다 단층기단과 얇고 넓은 지붕돌 등 전체적 이미지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탑신의 체감률이 적은 데서 오는 굳건한 느낌과, 그에 비해 기단이 좁은 데서 오는 가녀린 느낌, 지붕돌 모서리의 상쾌한 들림에서 오는 경쾌함 등 대립적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아름다운 백제탑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미륵사탑이나 정림사탑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백제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의 기법에서 신라 석탑의 양식이 보이므로 통일신라 초기의 탑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옛 백제의 지역에서 이어져오던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 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5년에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된 해체.복원 공사중,1층 지붕돌과 기단부에서 양식상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19매의 금판에 새겨진 금강경,청동여래입상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유물들은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65년의 발굴 결과 이 탑의 기초가 백제 시대의 유적위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세번째 주장은
"견훤의 도읍인 완산(전주)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 하는 『금마지(金馬志)』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새 국가의 앞날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도선의 의견에 따라 전국 각처에 풍수지리설에 따른 비보(裨補)를 했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과정에서 상부대관(上部大官).관궁사(官宮寺).궁사(宮寺)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들이 나와
이곳에 백제의 궁궐이 있었고,그 내부에 대관사.관궁사.궁사라 불리던 절이 있었으며 오층탑은 이 절의 유물이라는 추측도 다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애초부터 고려 초기의 탑인지,아니면 백제 때 조성된 것을 고려 시대에 보수했는지, 아직은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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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자료는 어떨까? "익산군 왕궁면(益山郡 王宮面 >에서 남쪽으로 2㎞지점 길가에 언덕을 이루고 있는 대지(臺地 >가 있는데, 예로부터 왕궁지< 王宮址 >라고 일컬어 왔다. 이곳에 서 있는 5층석탑이 ≪익산 읍지(益山 邑誌)≫ 금마지< 金馬誌 >에 「왕궁탑재궁허전고십장루석완연속전마한시소조(王宮塔在宮墟前高十丈累石宛然俗傳馬韓時所造)」라고 나와 있는 탑이다.

몇해 전까지 기단부가 파묻혀 있어 토단(土壇)처럼 되어 있었으나,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원형이 복원되었다. 발굴에 의하면, 탑기(塔基)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不等邊 高柱形) 주춧돌이 놓이고, 이 우주석(隅柱石)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으며, 우주석이 1층 옥신(屋身)의 우석(隅石)을 받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근처에서 갑석(申石)·면석(面石)들의 부서진 돌이 많이 발견되어, 각 면에 탱주(撑柱) 2개씩이 있는 단층 정4각형 기단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부서졌기 때문에 일부를 보강하는 한편, 토단(土壇)을 쌓아서 보호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옥개석(屋蓋石)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4우석(隅石)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中間石)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은 4면이 각 면 한돌씩이고, 3층 이상은 2개씩의 돌로 되어 각각 우주형(隅柱形)이 표시되어 있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나 등분(等分)되지는 않았다. 개석(蓋石)은 1층부터 3층까지 8개의 돌로 되고, 4·5층은 4개이다. 추녀는 얇고 추녀밑은 수평이나 우각(隅角)에서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여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있다. 옥상(屋上)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곡률(反轉曲率)도 경미한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딴 돌을 끼워 놓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부발(覆鉢)·앙화(仰花), 그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 있다.

이 탑에서는 보수 때에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일괄(一括) 국보 제123호(國寶 第123號))가 발견되었는데, 탑신부에서는 정4각형 돌에 좌우로 2개의 네모 구멍을 뚫고 유개금동함(有蓋金銅函)을 각각 장치(藏置)했었다고 한다. 동쪽 금동함(金銅函) 안에는 금제유개방합(金製有蓋方盒)이 있었고, 그 안에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연봉오리형 마개를 갖춘 녹색의 장두원저병(長頭圓底甁)이 있었다고 한다. 서쪽 금동함 안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그 안에 절첩식 금구(折帖式 金具)로 연결되고 금대(金帶) 2줄로 묶은 순금판경(純金板經)이 있었다고 한다.

기단에서는 품자형사리공(品字形舍利孔)이 있는 정4각형 심초석(心礎石)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서는 광배(光背)·대좌(臺座)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 1구(軀)와 청동령(靑銅鈴) 1개가 발견되었다.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당했는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 석탑에 대해서는 그 조성 연대에 대한 의견이 구구하였는데, 보수 전까지의 지견(知見)으로 옥개양식에서 백제탑계(百濟塔系)를 따르고, 탑신부의 돌 결구(結構)수법과 옥개받침 수법에서 신라(新羅) 석탑을 따르고 있으므로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의 작품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보수 때에 알게 된 기단의 구성 양식이나 사리장엄구의 양식을 종합하여, 옛 백제(百濟)영역 안에서 후세에까지 유행하던 백제계(百濟系) 석탑 형식에 신라탑(新羅塔) 형식이 첨가된 고려(高麗)초기의 조성으로 짐작되고 있다."  

 

근자에 와서는 백제탑으로 주장하는 논조가 힘을 받는 듯하다.

 

1965년 탑을 해체해 수리하는 과정에서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돼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었지요.

 

그런데 2003년 송일기 전남대 교수는 지붕돌에서 나온 금강경판을 중국과 일본에 있는 모든 금강경사경과 비교검토해 “백제 무왕 때 제작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듬해에는 한정호 통도사 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가 금제사리합의 내합에 새겨진 구름문양과 연꽃문양이 결합된 연화서운문(蓮花瑞雲紋)이 부여 능산리 고분의 금동산형투각장식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들어 6세기 중반∼7세기 전반 백제시대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무엇보다 왕궁리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올해 왕궁리 공방터에서 나온 도가니와 다량으로 출토된 금세공품의 성분과 제작 기법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은 백제의 장인집단이 만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왕궁리 탑의 사리함과 금강경판은 각각 동판과 은판에 금으로 도금한 것인데, 금과 수은을 2대8로 섞은 아말감을 쓴 기법이 바로 공방터의 그것과 똑같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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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 _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익산 왕궁리유적은 호남고속도로 익산 I.C에서 익산 시내로 들어가다가 금마면 소재지에서 좌측 전주방향으로 약 1km 지점에 있다. 이 유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왕궁터로 알려져 왔던 곳이며 조선시대 기록에도 고대 왕궁터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조선古朝鮮의 기준왕箕準王이 남으로 내려와서 세운 도읍성이라는 학설부터 마한馬韓시대의 왕궁터, 또는 백제시대의 왕궁터, 그리고 백제 멸망 이후에 후백제 견훤이 쌓은 궁성터라는 학설까지 다양하게 알려졌던 곳이다.

이 유적은 지난 70년대에 원광대에 의해 처음 발굴된 이후 1989년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매년 발굴을 계속하여 지금은 약 2/3가량이 발굴되면서 점차 베일에 가려진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는 왕궁리유적 한가운데에 서 있는 오층탑 주변부를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탑의 북편으로 사찰의 금당지와 강당지가 확인되었고, 여기서 발견된 명문銘文기와를 토대로 이 사찰은 ‘관궁사官宮寺’로 알려졌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무열왕조 661년도 기록에는 ‘금마 대관사大官寺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해 넘쳐 오보五步를 적시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발견된 명문기와 중에는 ‘대관관사大官官寺’ 라는 명칭도 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면 이 절이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관사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사찰유적과는 달리 왕궁성은 왕궁리유적의 외곽에 남북이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성벽이 돌아가고 있다. 조사 결과 이 성벽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바깥면에 맞추어 쌓고 그 내부에는 단단한 흙과 돌을 섞어 채워 넣었으며, 무너져 내린 성벽 윗면에는 기와편들이 덮인 것으로 보아 원래는 상부에 기와지붕과 같은 시설을 한 궁성宮城의 담장과 같은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궁성은 평면상으로 보면 동서 폭이 약 250m이고 남북길이가 약 500m로서 한 변 길이가 약 250m 되는 정사각형 2개를 합한 구조이며, 발굴 결과 그 내부에 일정한 비례를 적용하여 건물과 축대 등을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궁성의 모양이 직사각형이고 궁성의 설계에 일정한 비례를 적용하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예는 같은 시기 우리나라 삼국시대 궁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중국의 한대漢代 장안성長安城이나 북위대北魏代의 낙양성洛陽城과 같은 경우에 그 모양과 비례 상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 문화의 흐름으로 보아 중국 도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왕궁성의 남성벽에는 궁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지가 세 곳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중앙문을 따라 들어가면 현재 탑이 서 있는 부분에 도달한다. 즉, 탑을 포함한 사찰터가 왕궁의 중심터였다는 것인데, 발굴 결과 왕궁리유적에서 사찰 건물지보다는 왕궁 건물지가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사찰이 있었던 곳에는 그보다 앞서서 왕궁 건물이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결국,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이나 발굴된 유구遺構(인공 흔적이 있는 구조물이나 잔해물)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시기적으로 백제 무왕武王 대에 먼저 왕궁이 세워졌다가 얼마 후 왕궁이 폐쇄되고 그 기능을 다한 후 다시 백제 말경에 절터로 그 성격이 변해 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2003년도에 발굴 도중 재미있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백제 당시에 사용되었던 화장실이 발굴된 것이다. 이로써 그동안 잘 알 수 없었던 우리나라 고대 화장실의 실체를 잘 알 수 있었고 그 내부에 쌓인 퇴적토를 분석하여 백제인들의 식생활과 질병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처음 발견 경위를 살펴보면, 왕궁성 내부의 서북편 일대는 평평한 대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발굴 결과 여기서는 금, 은, 유리 제품 등을 만들던 공방工房 흔적이 나타났다. 공방의 남쪽에 인접하여 동서방향으로 큰 배수시설이 있는데 화장실은 이 배수로 남쪽 가까이서 배수로와 연결되어 나란히 3기가 확인되었다. 그 구조는 제일 큰 것이 깊이 약 3m, 폭 약 1.8m, 길이 약 10m로서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좌우 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올려 지상에서는 추정복원도와 같이 간단한 구조의 화장실 건물로 결구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화장실로 판명되기 이전, 처음 발견 당시에는 지하식 저장고 또는 물을 담아 쓰던 저수시설 등 여러 가지 추정을 하였다. 그러나 내부에서 채취한 퇴적토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여기서 회충, 편충, 간흡충과 같은 기생충 알을 다량 확인하고, 또한 퇴적토에서 당시에 뒤처리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막대기를 확인함으로써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나무막대기는 우리와 같은 화장실이 다수 발견된 바 있는 일본에서도 같은 형태가 확인되고 있어서 화장실을 판명하는데 결정적인 비교자료가 된다. 또한, 이 화장실은 어깨 부분에 작은 배수로가 있어서 오물이 어느 정도 차면 배수로를 통해 오수가 처리되는 즉, 오늘날의 정화조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어서 간단한 구조이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이러한 화장실이 발견된 예가 거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우리와 유사한 이러한 화장실 유구가 상당히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고로칸 유적에서는 8세기경의 화장실이 발견되어 좋은 비교 예가 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는 그동안 부여 관북리 등에서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손잡이 달린 개인용 변기가 나온 예가 있기 때문에 이로 보아 왕궁리 화장실은 아마도 공방생활을 하던 당시 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공동화장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근 이러한 땅속에 묻힌 매장문화재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진일보하여 단순히 토기나 기와 등의 유물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토양분석이나 유기물분석 또는 인골의 DNA 분석 등 다양한 자연과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대인들의 생활방식이나 당시의 환경, 그리고 고대 문화 형성 및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얻어내고 있어서 고대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분야로 자리 잡고 있는 추세이다. 
 

2008.07.0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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