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완주군

[스크랩] 완주...송광사

임병기(선과) 2008. 7. 2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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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추억을 되살려 옛님의 숨결을 들쳐보니 2004년 4월 29일 비오는 이른 새벽 발걸음이 스쳐간 가람이다. 회사에서 대둔산 산행 후 전주에서 우리님들과 만나 다음날 군산 답사를 도모하였는데 뜻밖에도 고운 님들과 인연이 닿아 종남산 송광사를 5년만에 다시 순례하였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송광사는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이다. 완주의 송광사도 이제는 답사 매니아, 동호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절집으로 순천 절집과 전혀 연관성이 없지는 않다. 즉  순천 송광사의 중창주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듯,  완주 송광사 또한 지눌 스님이 점지하고 훗날 그의 법손들이 1622년 불사를 이루었다고 개창비에 기록되어 있다.

 

송광사 창건은 신라 진평왕(583년) 에 터를 잡고, 경문왕(867)에 보조체징(普照體澄)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구체적 사료는 없다.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많은 사찰이 그러하듯 체징과 지눌 스님의 호가 같다는 시각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수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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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 산지가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백제 고토에 자리한 평지가람 진입동선 특징을 공부할 수 있는 사찰이 송광사이다. 1975년 서암스님이 쓴 일주문 편액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으로 시선을 옮기면  금당 부처님이 이미 순례자의 가슴으로 다가온다.

 

04년 나의 답사기에는 대웅전 중정에 탑이 시선을 차단하였다고 했는데 어떤 연유이든 탑을 옮겨(?) 시각적인 정연함과 안온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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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보조기둥으로 인해 다소 약해 보이는 일주문은 본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3㎞ 지점인 나드리(현재 무주ㆍ진안 방면의 도로입구)라는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사 경역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1814년 정준(定俊) 스님이 조계교(曹溪橋)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 해광극인(海光克仁) 스님이 다시 현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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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금강문-천왕문 진입동선에서 처음 맞이하는 금강상이다. 호남지방은 따뜻할텐데 윗옷을 입은 금강 역사상은 익숙치 않아 의아스럽다. 천왕문 사천왕도 일반적인 배치를 하였으나 방위는 달랐다. 사천왕은 주지스님도 모른다고 하였으니 그런 시각을 가진 내가 잘못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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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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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가람 진입 공간 처처에 조성한 화원으로 인해 허전한 느낌이 누그러진다. 비비추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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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중정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십자형 범종루이다. 한때는 국내 유일의 건물이었으나 통영 미래사에도 최근에 조성하였다. 2층 누각이며,지붕은 2개의 겹처마 팔작지붕이 십자로 교차된 형식이고 공포는 다포식이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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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하기단의 소맷돌의 용? 퍽이나 익살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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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등에 올려진 노주석과 소맷돌 용, 조선조 중창시에 조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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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중정. 대웅전으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했던 석탑은 어디로 갔을까? 불사로 이룩한 탑을 해체 이동 하는 일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텐데 우리나라 모든 절집에 무분별하게 조성된 석탑, 석등정리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 하다.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식 건물로 1622년에 처음 지어졌을 때는 2층이었으나 1814년 과 1857년에 건물이 기울어져 1층으로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봉안된 삼존불에 비하여 금당이 낮아 보이는 이유가 본래는 이층 전각에 모셔진 삼존불 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웅전은 처마의 깊이가 너무 얕아(내 상식으로는 남부지방의 처마의 깊이는 깊은 것으로 알고 있다)의아스러우며,지붕이 짧게 단발한 소녀를 닮은 모습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연유로  빗물이 기단 및 기단 가까히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이하게도 기단을 덧달아 놓았다. 

 

영남 산지 가람의 한결 같은 구조와 오밀조밀하고 포근한 느낌에 익숙한 사람에게 평지가람 송광사의 넓은 가람 배치와 여유로운 공간, 비정형적 구조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호남지방민의 얶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도 가람구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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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천장에는  주악비천도가 전면에 7점과 좌우 천장에 각 2점씩 총 11점의 비천이 그려져 있다. 비파를 타는 비천, 피리를 부는 비천, 칼춤, 바라춤,장고춤과 승무를 추는 비천, 북을 치는 비천이 등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으며 사진처럼 벽면에도 재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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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의 소조삼존불. 국내에서 소조불상으로는 가장 큰 삼존불은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 사진 오른쪽에 약사여래불, 왼쪽에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항마촉지의 석가여래좌상은 나발에 백호가 보이고 법의는 통견이다. 

 

근래에 석가모니불에서 삼존불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 불경류,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는데, 삼존불은 1641년(인조 19)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발원하면서 조성하였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그런 아픈 역사적 상황때문인지 삼세불은 국가에 큰 일이 일어나면 땀을 흘리는 이적이 보인다고 한다.

 

사진 좌측에 보이듯이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3점의 나무 패(牌)는 1644~1661년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각기 왕과 왕비와 세자를 위한 것으로 중앙의 목패에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라 썼으며, 좌우의 목패에는 각각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ㆍ‘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壽千秋)’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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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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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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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전이 다른 사찰에 비해 커고 업경대를 갖춘 까닭은 송광사가, 고창 선운사, 철원에 있는 심원사, 충남 서산의 개심사와 더불어 국내 4대 지장기도 도량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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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 양식 팔작지붕 건물로 1656년(효종 7)에 벽암 각성(碧岩覺性) 대사가 송광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으며 1934년 혜광스님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ㆍ인왕상ㆍ동자상ㆍ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석가여래와 16나한의 복장물 중에서 1656년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시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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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정.사찰 전각에 亭자 건물을 보았는가? 묘한 느낌이다. 산신각, 칠성각이이 전통 민속과 도교의 흡습으로 사찰에 이입된 사상과 건물이듯 유교와 불교의 절묘한 조화로 이해해야 할까? 산청 남명 선생을 배향하는 덕천강 강가 덕천서원 앞의 세심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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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개창비.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사찰 건립을 당부했다는 내용과, 보조국사에서 벽암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뒷면에는 송광사를 짓는 데 참여했던 이들 중 한 명인 승명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대사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개창 당시 기술자들의 이름 등을 기록하였다.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의창군 광이 글씨를 썼으며, 1636(인조 14)에 세웠다. 크기는 높이 2.4m, 폭 94cm이며,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에 분명 부도밭을 근처에서 보았는데 찾지 못했다. 나오는 길에 기와불사 접수중인 처사님께 여쭈었더니 바로 지근에 있다고 했다. 작은 팻말 하나만 세워두었으면 객에게는 감로수가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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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벚꽃이 아름다운 진입로로 알려져 있지만  계절과 무관하게 저물 무렵 젖어 들고픈 가람이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도 만나보고, 약소국가의 세자와 대군이 볼모로 잡혀간 참담한 역사도 돌이켜 보자.  넓은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한없이 부럽지 않은가?

 

2008.07.0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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