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완주군

[스크랩] 완주 / 위봉산성, 위봉사

임병기(선과) 2008. 6. 6.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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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은 길이 의심스러워 송광사 앞 슈퍼에서 물었더니 아주 상세하게 안내해 
주시며 계속해서 가면 화암사로도 이어진다는 말씀을 하신다.  좁은 2차선 길을 달려 굽이굽이
고갯길을 올라 갔더니 고갯마루에 위봉산성 성문이 옅은 안개에 싸여 모습을 보인다.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 할만큼 전국각지에 산성은 분포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산성이 전란을
피하거나,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축성되었는데 비해 위봉산성은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을 유사시에 모시기 위해 축성되었다하니, 숙종 연간에 인근 7개 고을의 
민초들이 7년에 걸친 고초가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런저런 사정을 말없이 지켜보았을 석성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듯 홍예형의 서문만 옹성과 
함께 남아 있어 오가는 이에게 왕조와 관련하여 많은 상념에 젖어들게 한다.
더구나 태조의 어진이 외적의 침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갑오농민 전쟁시 민중의 봉기를 피하여
이곳으로 어진이 옮겨왔다니 씁쓸한 맘 가눌길 없으며,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새기며
산자락을 돌아 아직 벚꽃이 피어있는 위봉사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반적 사찰은 일주문에서 한 참을 진입하여야 천왕문이 있는데 위봉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눈 앞에
온 갖 나무가 가득한 계단형의 정원이 눈길을 잡고,바로 천왕문이 보인다.
천왕문에 목조 사천왕상이 벌거벗은 몸매를 들어내고 계셔 이른 아침이 아니라면 금어와 대화를
나누고픈 맘이 간절하지만 그건 나의 욕심임을 알기에 봉황루를 통과하며  위봉사의 창건 설화를 
되짚어 본다. 
"이 절 극락전 중수기에 의하면, 신라말기 한서민이라는 사람이 산위에 오르니 숲에서 봉황 3마리가
노닐어, 이곳에 절을 짓고 시민의 새 봉황이 이름을 따서 위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봉황루를 올라서면 누대는 지장전 현판을 달고 보광명전과 맞보고 있는 배치기에 고개가 갸웃
거려지지만 가람 전체를 차지한 중정 가운데 한그루의 소나무가 탐승객을 포옹하여 기분이 새롭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비웃기나 하듯 송광사 대웅전처럼 보광명전도 처마의 깊이가
얕다. 보광명전이라면 비로자나불이 계실텐데 안내문에는 아미타불로 설명되어 있지만 내눈에는
석가모니불로 비쳐지건만 산자락을 감싼 안개에 시각은 마냥 즐겁고, 밥 짓는 내음은 염체없이
콧구멍을 미치도록 만드는데, 비구니 선원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는 허기에 울리는 뱃속의 꼬르륵 
소리와 화음을 이루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놈은 속물 근성임에 틀림이 없군!!!
위봉사에서도 놓칠 수 없는 전각이 工자 형 관음전으로,요사겸 전각으로 사용한듯한데 우리 고건축
에서는 일반적으로 工자를 음이 같은 빌 空으로 해석하여 건물이 쉽게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잘
쓰지 않는 양식인데(도산서원의 기억나지 않은 건물도 工형태지만 공을 공부로 해석한다) 관음전은
工자형 건물이다. 그것보다는 관음전에 걸린 위봉사 현판은 대나무와 난초가 그려져 있어 재미가
쏠쏠하다. "일제 강점기에 글과,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해강 김규진과 죽농 서동균이 팔도 유람을
하며 31 본산에 남긴 편액으로 추정 한다"
또다시 절집을 나서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뭔가를 두고 온 듯하여 폰과,지갑을 살펴보지만 
제자리에 있다. 알 수 없는 찜찜함의 연유는 그 날 저녘에서야 알았으니 보광명전 후불벽의 
백의관음보살을 친견치 못했음이란 것을...
2004.04.19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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