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괴산군

[스크랩] 괴산...연풍 동헌.향교.천주교 성지

임병기(선과) 2008. 6. 26.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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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 마애불 답사후 천연기념물 383호 적석리 소나무를 찾아 헤매이고 헤매이었다. 네비도 멈추었고 마을 어르신도 구체적으로 모르셨다. 물어 물어 찾아갔지만 모건설회사 사유지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화가 치밀었고 진을 너무 빼 녹초가 되었지만, 누구 탓을 하리오? 어느 지자체도 마찬가지지만 큰 도로변에 문화유산 이정표 설치가 너무도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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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동헌은 조선 인조(仁祖) 6년(1628)에 장풍현(長豊縣)이 연풍현(延豊縣)으로 되자 현종(顯宗) 4년(1663)에 현감 성희위(成熙胃)가 조령아래 지금의 연풍면 삼풍리에 동헌을 처음 지었다.

이후 건물이 퇴락하여 영조 42년(1766) 현감 이덕부(李德溥)가 동헌의 남쪽에 새로 동헌을 짓고 '풍락헌(豊樂軒)'이라 이름하니 성사익(成士翼)이 옛 동헌에 '이은재(吏隱齋)'라는 현판을 써서 적었다고 전하는 바, 지금의 연풍동헌은 1766년에 지은 풍락헌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15칸의 2익공 5량집으로 팔작지붕 겹처마의 목조기와집이다.

1912년에 개교한 연풍보통학교가 1920년부터 교사(校舍)로 사용하면서 '흥영관(興英館)'이란 편액을 붙였으며, 1965년 중수하고 1972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연풍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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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풍동헌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단원 김홍도이다. 천재 화가로 불린 김홍도는 정조 재위시절 1791년부터 1795년까지 괴산 연풍 현감을 지냈다. 도화소 화원으로 그림을 그리던 김홍도는 1791년 정조의 초상을 잘 그린 공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관직인 연풍 현감을 제수받아 5년 남짓 괴산 연풍에서 생활했으며  단원은 괴산 연풍의 상암사, 이웃 고을 단양 등의 명승지를 찾아 화폭에 담았다.

 

괴산군에서도  역사적 사실에 준해 김홍도 거리를 조성한다고 한다. "연풍 동헌 등 조선시대 현의 유적이 남아 있는 연풍면 행촌·삼풍리 등에는 2011년까지 김홍도 거리가 조성된다. 이곳에는 단원의 대표작인 ‘씨름도’, ‘명경대’, ‘옥순봉’, ‘단원도’ 등이 전시되고, 건물·상점의 벽·간판 등도 단원을 상징하는 글과 그림 등으로 꾸민다. 시내 중심가에 들어 설 단원 김홍도 공원에는 조선시대풍의 산책로·휴게소 등을 만들고 단원 미술관에는 그의 대표작들을 전시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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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연풍 동헌 자리의 개교 100년이된 연풍 초교. 아득한 옛날 이야기 같지만 내가 아는 이학교 출신의 어느님은 저고개 너머 희양산으로 소풍도 갔다고 했다. 그 님의 예술적 감각과 시상의 탯자리는 천부적 재능, 후천적 노력, 교육적 환경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눈앞에 전개되고, 체험한 자연환경이 아닐까?

 

동헌의 누문 객사등 주요 건물운 모두 소실되었다. 첩첩산중이었던 산골 연풍도 지금은 중앙 내륙고속도로 개통으로 이화령  고갯마루 주막의 영화도 이제는 무성영화 변사의 구슬픈 목소리 처럼 공허한 메아리로 들려온다. 척박한 환경 때문에 울면서 부임하고 떠날때는 인심과 빼어난 환경 때문에 울면서 떠났다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도 달빛에 젖은 야사로 남겠지?

 

먼훗날 개발이 가져온 반사이익보다 가난하고 외진 시절의 향수병은 앓지 않을것인지? 그립다는 말로 치유될 상처라면 차라리 그대로 보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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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향교는 문이 닫혀 있다. 하마 아니지 하차하여 기웃기웃 참 한심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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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교(鄕校)는 조선(朝鮮) 중종(中宗) 10년(1515)경에 창건(創建)되어 여러차례 중수(重修)되었고 6·25동란시 명륜당(明倫堂)과 동·서무(東·西무)가 소실(燒失)된 것을 최근에 명륜당을 재건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식(前學後廟式)으로 안담장에 내삼문을 두어 구획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목조이고 4성22현(四聖二十二賢)을 지방유림이 춘추로 향사(享祀)하고 있으며,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이밖에 고직사(庫直舍)가 있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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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성지는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셨다는 성인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신부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유서깊은 성지로, 1791년(정조 15) 신해교난(辛亥敎難)으로 연풍지역에 은거하던 가톨릭 교인 추순옥·이윤일·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이 1801년(순조 1) 신유교난 때 처형당한 자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연풍은 초대교회 당시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뿌리깊은 교우촌이기도 했다고 한다. 1963년 천주교회가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기 위해 전에 헌병주재소, 경찰지서 등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고 전하는 조선시대의 향청 건물을 구입하였는데, 이곳에서 논과 집터 정리 작업을 하면서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를 발견하였고, 1968년에는 한국천주교 103성인(聖人)에 속하는 황석두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본격화하여 1974년 천주교회에서 이곳을 성역화하였고, 1982년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의 유해를 이장해왔다.


황석두는 1813년(순조 13) 연풍면 병방(兵房)골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 3)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하였다. 성지 내에는 옛 연풍향청 건물과 높이 8.5m의 십자가상, 황석두의 입상과 묘가 있다.
십자가상 왼쪽에는 역시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순교현양비가 서 있다.

 

영풍성지에서 발굴된 형구돌은 모두 3개로 첫번째 것(1963년)은 절두산 성지에 기증, 보관돼 있으며 두번째 형구돌(1972년)은 성지내 형방 건물 정면 쪽에 그리고 세번째 형구돌(1992년)은 대형십자가가 있는 치명터로 부터 50미터 지점에서 발굴되어 성지내에 전시하고있는데, 그 규모는 직경 1미터, 둘레는 4~4.5 미터의 크기이며 바위돌 가운데에는 직경 25~30 센티미터, 뒷 직경은 7 센티미터 원추형 구멍이 뚫려 있다. 매년 수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충북문화관광허브

 

2008.06.21

 

 

  Richard Clayderman / Souvenirs D'enfance(어린시절의 추억)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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