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남원시

[스크랩] 남원...광한루원

임병기(선과) 2008. 6. 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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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은 견우와 직녀가 칠월칠석날 은하수 오작교를 건너 만나는 사연을 담은 정원이다.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뜻하는 연못을 파고 무지개형 교각 네 개를 이어 오작교를 세웠다. 후에 정철이 연못에 신선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었다. 봉래(蓬萊)·방장(方丈)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영주(瀛洲)섬에는 작은 정자를 세웠다. 춘향전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은 이래로 정원 안에 춘향과 관련된 여러 유적이 들어섰다.


광한루원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정원은 크게 나누어 왕실에서 조성한 정원, 관아에서 조성한 정원, 그리고 개인이 조성한 정원 세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으며, 광한루원은 고도 남원부 관아에서 조성한 곳이다. 왕실에서 조성한 곳으로는 경복궁과 비원 등 대궐 공간을 들 수 있으며 왕실문화와 더불어 조정의 문무백관이 나라를 다스렸던 흔적이 잘 남아있다. 개인이 조성한 곳으로는 조선조 기묘사화때 양산보가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은거하여 조성한 전남 담양군에 있는 소쇄원을 들 수 있다.


세 곳 모두 당시 주변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살리면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 기술과, 그곳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사회상과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누정 자체 건물을 아름답게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정을 세우게 된 동기와 주변의 풍경이 매우 조화를 이루어 누정에 올라 감상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계로 흠뻑 빠져들도록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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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에는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외부에서 보았을 때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고, 필요시에만 문을 사용한 것은 그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누원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고,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몄으며, 하늘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오작교 다리를 놓아 달나라처럼 생각이 들도록 하였다.

정원바닥은 인공적인 멋을 가하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믄드믄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 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외국에서는 정원의 바닥을 거의 수평으로 하거나, 수목에 자주 전지를 하는 것에 비하면 퍽 대조적이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 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누원앞 호수는 은하수의 상징으로서, 은하수옆 누각은 자연스럽게 하늘나라 건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표현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재 종묘건물 동편계단 소맷돌에 구름 문양을 새겨서 구름위에 지은 집인 운상각(雲上閣)이 있는데, 이러한 상징을 이해하여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찾아 볼 때마다 답사의 묘미가 한층 더해져 문화유산과 만남은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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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수는 전라관찰사를 지낸 정철의 지시와 부사 장의국에 의하여 모습을 갖추었는데, 이때에 못을 깊게 파고, 전설 속의 삼신산인 영주(한라산)·봉래(금강산)·방장산(지리산)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요천에 흐르는 쪽빛 옥류수를 끌어들였다. 이 같이 계류를 호수로 끌어들인 기법은 당시 도수로 설치 등 토목기술이 무척 발달한 것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은하를 가로지르는 오작교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만나는 전설을 형상화하였다. 이와 같은 구성물은 하늘나라의 조경을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광한루원 상징물중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 호수에 물이 가장 맑을 때는 겨울철 지리산 자락 계곡마다 쌓인 잔설이 녹아 흘러 유입될 때이며, 이때는 호수 바닥에 나뭇잎 무늬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주역에서도 오행중 물(水)은 북방에 자리잡으며 겨울을 상징하고 검정색으로 표현한다. 불(火)은 남방에 자리잡으며 여름을 상징하고 적색으로 표현하다. 나무(木)는 동쪽에 자리하며 청색으로 표현하고 봄을 상징한다. 금(金)은 서쪽에 자리하며 백색으로 표현하고 가을을 상징한다. 그리고 중앙에 토(土)를 배치하고 황색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은 음양오행 사상을 선조들은 누원 조성에 반영하였으므로 음양오행을 알면 우리문화를 빠르게 익힐 수 있으며, 우리 시에서 태극의 역동적인 곡선을 사랑의 상징인 하트모양으로 처리하고, 활기차게 타오르는 남방색을 주색으로 하여 디자인한 심볼마크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호수에는 많은 잉어가 서식하고 있는데, 선비들은 잉어를 용이 승천하기전의 성스러운 동물로 여겼다. 중국 황하강 상류 용문협곡에는 많은 잉어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용문협곡 폭포를 오르는 잉어는 용이 된다 하여, 과거 급제자를 등용문이라 일컫는 고사성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등고시·예술·체육 부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등용의 꿈을 안고 지내는걸 보면 등용의 고사성어는 오래도록 전해질 고사성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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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는 선조 15년(1582)부사 장의국이 삼신산과 더불어 조성하였으며, 현재 폭 2.8m, 길이 58m, 네 개의 구멍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홍예(虹 ) 다리이다. 고사 천문류초에 의하면 쌍무지개가 떴을 때에 색깔이 선명하고 성한 것은 숫무지개라 하고 홍(虹)이라 하며, 어두운 것은 암컷이 되니 예( )라 한다. 이는 음과 양이 사귀어 모인 기운이라 한다.


옛날 하늘에는 옥황상제의 딸 직녀와 미천한 소몰이꾼 견우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였는데, 이를 알게된 옥황상제가 몹시 노하여 견우는 은하수 밖에서 소를 몰고, 직녀는 베를 짜도록 한 뒤, 일년에 한번 다리도 없는 은하수에서 만나도록 하였다. 이들의 만남이 너무나 애닯아 칠월 칠석날에는 지상의 까치와 까마귀가 모두 은하수로 올라 다리를 만든 연후에 다리를 건너 만나게 하였더니 이때 만난 견우와 직녀가 흘린 눈물이 비를 이루어 세상 사람들은 칠석날이면, 까치와 까마귀를 볼 수 없으며, 비가 오는 까닭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같은 하늘나라 견우와 직녀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이도령·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다. 옛적 조상들은 다리가 양쪽을 연결해 주는 곳이자 구분을 짓는 곳으로도 생각하였다. 사찰앞 다리는 속계와 사찰을 구분하는 곳이요, 성곽앞 다리는 성곽과 외곽을 구분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중요한 곳으로 이용하였다.


누정 앞 다리는 선비들이 월궁에 오르기 전에 다리를 건너면서 마음을 호수물에 깨끗이 씻고, 은하를 횡단하는 기분으로 지난 상징의 장소이다. 광한루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시 역시 지은이들이 오작교를 거닐며 마음을 호수 물결속에 씻고, 광한루를 천상의 세계로 생각하고 시를 지었릉 것이다. 궁궐에도 이 같이 조그마한 개울에 다리를 놓아 신하들이 궁중에 입궐할 때 마음을 씻고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라는 상징의 다리 금천교가 궁궐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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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사당옆 담장밑에는 30기의 비석이 두줄로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은 이곳과 인연을 맺은 부사·관찰사·어사들의 선정비·선덕비 등이다. 이 비석이 예전에는 동헌이나 부내 여러 곳에 있다가 광복후에 이들 비석의 보존과 미화책으로 광한루에 모아 관리하게 되었다. 비석군 역시 한 장소에 이처럼 많이 있는 곳도 찾아보기 드물다.

 

그 중에는 광해군때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후에 청백리로 녹선된 민여임 부사의 비가 있으며, 정조와 순조때 두 번에 걸쳐 관찰사를 지낸 이서구 관찰사 비도 있다. 이서구 관찰사는 호남고을 지명을 모두 넣어 호남가를 지었다고 전한데 가사내용은 관리들이 갖추어야 할 내용을 담은 정겨운 곡으로 무려 200여년이 넘게 불려지는 단가이다. 그밖에도 수많은 일화가 있으며 역학에 밝아 일본동출(日本東出) 서산몰(西山沒) 오미방광(午未放光) 신유이(申酉移)라는 비결을 전하였으니, 이는 일본이 동에서 떨쳐 일어났다가 패망하는데, 임오년(1942)과 계미년(1943)에 극성을 극성을 떨다가 갑신년(1944)과 을유년(1945)에 망한다는 비유이다. 지금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비석과 호석을 찾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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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원 동쪽 모퉁이에 자릴 잡은 사당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속에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남원의 유지인 이현순씨의 발기로 사당을 지을 때 권번선생 이백삼과 퇴기 최봉선 등이 규합하여 기금을 모았다. 이때에 진주·평양·개성·동래 등 전국의 권번을 찾아 성금을 모금하여 1931년 사당을 건립하고, 그해 6월 20일 단오날 준공식과 함께 최초로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배경속에는 당시 이 지역 선비들의 곧은 선비정신이 국가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분연히 일어나는 충절의 정신을 특이하게도 여성들과 함께 힘을 모아 추진하였으며, 만인의사 순절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에 일본 경찰들이 갖은 탄압과 회유를 하여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어 오늘날의 춘향제가 되었는데, 전국의 축제행사중 가장 유래가 깊은 행사이다.

사당 안에 정숙한 자태로 바라보고 있는 춘향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렸으며, 본래는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렸고, 뒤에 이당 김은호가 그린 작품을 광주사람 현준호가 기증하였는데, 6.25동란중에 훼손되었다. 그후 춘향 1962년 정부내각수반 송요찬이 이당이 그린 그림을 다시 기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정면 문 위에는 자라가 등에 토끼를 태우고 물결을 헤치며 이동하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이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수궁가의 상징이라고 한다. 소설 별주부전 내용에 의하면 용왕을 위하여 토끼간을 구하러 육지를 찾는 자라는 충성의 표상이요, 자라에게 속아 번득이는 기지로 용궁을 탈출한 토끼는 지혜의 상징이다.

 

이 부분은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나라가 처해있던 사회상으로 미루어 볼 때 사당을 지은 선현들의 생각을 눈여겨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러한 형상을 부적이라고 하여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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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집은 고전문학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 이한림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던 성춘향에 반하여 월매집을 찾아 백년가약을 맺었던 내용에 따라 월매집이라 하였다. 월매가 살았던 본채와 춘향이가 살았던 부용당(芙蓉堂), 행랑채를 지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도록 밀랍인형과 생활도구를 진열해 놓았다. 월매가 한양 간 이도령의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기도를 했던 '장원급제기원단'이 만들어져 수험생을 둔 학부모나 자식의 성공을 비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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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월정은 1971년 경역확장때 세운 수중누각이다. 호석은 완월정에서 서문방향 잔디밭에 있다. 이 호석은 조선조 정조와 순조때 두 번에 걸쳐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서구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수지면 고평리에 속칭 개머리산에 들개들이 떼지어 인명을 해치거나 큰 화재가 일어나는 등 괴변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이서구 관찰사는 남원부사에게 명하여 개는 호랑이어야 제압할 수 있는지라 호석을 만들어 견두산을 바라보도록 하니 이후에는 재난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고 한다. 광한루 경역이 확장되기 전에는 시장자리였는데 그때는 호석거리라고 불렀다.


옛적에 남원팔경중 광한추월(廣寒秋月)을 꼽는데, 이는 가을에 주천면 월봉산을 거쳐 요천 인도교앞 승월대로 달이 뜰 때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야간에 도시전체가 가로등으로 불야성을 이루어 달뜨는 장면이 예전 같지 않다. 수중누각 완월정은 이와 같은 의미보다 춘향제행사 본무대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출처:남원 문화원  

2008.04.1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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