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남원시

[스크랩] 남원...사직단, 관왕묘

임병기(선과) 2008. 6. 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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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는 디지털남원문화대전과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습니다. 우리님들 훗날 답사 자료로 활용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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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사직단. 전국 대부분 사당처럼 문이 닫혀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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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남원시 용정동 앞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사직(社稷)의 사(社)는 토지신이요, 직(稷)은 곡물신을 의미한다.

토지가 있어야 씨를 뿌려 식량이 된다. 그러므로 토지와 곡식은 나라살림의 원천이 되므로 사직은 곧 국가를 상징한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말은 모두 토지와 곡식없이는 국가나 종묘가 존립할 수 없음을 뜻한다.

본래 사직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서, 중국에서는 새로이 나라를 세우면 천자나 제후(諸侯)가 단(壇)을 세워 제일 먼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드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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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세워짐에 따라 전국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도 사직단을 세우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정월이 되면 고을의 원님들이 사직단에 나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친히 제사를 드려 그해의 풍년과 고장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 전북 남원 사직단(社稷團)의 사당에 모셔진 신주. 사(社)는 토지의 신이며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이른다.
ⓒ 이철영 (출처: 닥터 모모의탈모 치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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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관왕묘는 남원시 왕정동에 있으며 관우의 조각상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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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중국 촉한의 영웅 관우를 향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부터이다.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군대가 왜군과 싸우며 일진일퇴하던 중 밤이 되어 하늘에서 수천의 신병(神兵)이 나타나 왜군을 물리쳤는데, 당시 신병을 거느리고 나타난 장군이 바로 관우였다고 한다.

이에 관우의 고마움을 생각하여 그를 숭배하는 묘(廟)를 세웠다고 한다. 관왕묘는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었지만 현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남원관왕묘는 현재 관우를 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을 봉안하고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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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닫힌 사당. 담너머 지켜보아야 했다. 열쇠 가진분의 전화라도 남겨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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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關王廟)는 중국(中國)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명장(名將)인 관운장(關雲將)을 배향(配享)한 곳이다. 이 묘(廟)는 원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이곳에 주둔하였던 명(明)나라 장군 리우띵(劉綎)이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던 관운장을 모시기 위하여 선조(宣祖) 31년(1599) 남원부(南原府) 동문(東門)밖에 세웠던 것이다. 그후 영조(英祖) 17년(1741)에 현 위치로 옮겨 짓고, 매년 춘추(春秋)로 제사(祭祀)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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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탄보묘(誕報廟 : 관우의 탄신과 왜적을 무찌른 데에 대한 보은’이라는 뜻)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축이며, 대문은 솟을삼문 형태이다. 사당 안에 관우의 소상이 중앙에 모셔 있고 앞에 시립한 두 부장의 소상이 서 있다.

사당에는 ‘충의와 절개가 만고의 제일(貞忠大節 千秋第一)’이라는 주련(柱聯)을 비롯한 네 개의 주련이 네 기둥에 걸려 있어 관우의 위용과 덕망을 칭송하고 있다.

사당 앞에 ‘명조도독우정건묘사적비(明朝都督劉綎建廟事蹟碑)’가 세워졌고, 현감 박내정이 중건을 기념하여 세운 ‘무안왕비(武安王碑)’가 있다. 솟을삼문 밖에는 관왕묘 사적을 표시하는 조그마한 비석이 있다.

 

2008.04.12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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