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출지
이종암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못의 아가리 위로 저 연꽃은 왜 피는지 그냥 못 둑에 서서 입만 벌어지다 다들 돌아간다
천 년 묵은 이 연꽃의 비밀을 나는 말해야만 한다 천년 사랑의 비밀 문서가 내장되어 저리 연꽃이 피는 書出, 池의 속사정을 나는 끝내 말해야 한다
막막한 뻘흙의 층을 지나 어둔 물 속의 계단을 밟고 초록의 세상 위로 고개 내민 연꽃은 사랑의 비밀 문서다 저것 때문에 못 둑의 늙은 배롱나무에서도 석 달 열흘 불꽃은 타오르는 것인가 비밀 문서가 세상에 나온 오늘 연꽃에 멱살 붙들린 서출지,
난리 났다고 물 속 억머구리 구르륵 꾸륵 울고 나 몰라라 저녁 해는 서둘러 제 길 떠나고 못의 아가리 주변을 따라 널브러져 있는 들꽃들은 초록으로 빨강으로 문서를 숨기려 저 야단들이다 물위 노랑어리연도 고개 쳐들고
사랑의 비밀 문서가 확 펼쳐진, 오늘 저 난리들 속에서
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오래전부터 연꽃 피고 배롱 만개할 즈음 서출지를 들려보라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그게 쉽지는 않았기에 방향을 잡았다. 만개하지 않아 오히려 더 좋았다면 말장난인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扁)에 서출지에 얽힌 사금갑(射琴匣) 설화. 신라 소지왕 10년(488).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에 행차 도중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 가보라 하였다. 왕이 신하를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가 남쪽 피촌에 이르러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가는 곳을 잃어버렸다. 이때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 주었고,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開見二人死 不見 一人死"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겉봉에는 씌어 있었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뜻한다고 하며 왕에게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射琴匣(사문갑) 거문고갑[琴匣]을 쏘라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녀 승려가 정을 통하고 있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 났다고 한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이요당(二樂堂) 이라는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二樂는 논어의 " 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 "에서 유래한 정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걸려 있는 선친의 친필이 떠올라 콧끝이 찡해온다.
암으로 투병 하실 때 한 번 모셔 왔더라면....
2007.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