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스크랩] 대구 나무 답사...계산성당 이인성 나무

임병기(선과) 2008. 6. 6. 17:41
728x90
728x90

 

무작정 걷고 싶은 날은 없었는가?

마음 통하는 님들과 옛길, 역사가 흐르는 길, 서민의 삶이 농축된 길을

 

내가 아는 것 보다 더 재미나고 신나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그런 님들과 동행

그 가슴 떨리는 걸음걸음

 

이제막 발걸음을 시작한 나에게 순간순간 다가오는 희열에

부끄러움도 잊고 어린아이가 되었다.

 

대구 나무 답사.

'나를 찾아 나무를 찾아' 동호인을 따라나선 배움의 길

떠남에 주저함이 없었던,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풀어야 할 또다른 숙제.

 

작은 희열을 우리님들과 나누고져 한다.

뒤에서 걸어오는 옛님을 위해서...


 


대구 계산성당/문화재청

 

이인성 화백의 작품 [계산성당]에 나오는 감나무를 대구시에서 이인성나무로 명명하였다. 사실 계산성당은 대구를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대구 골목길 답사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근대문화유산으로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86년 로베트(Robert.A.P)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해 화재로 불에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인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진 우측  나무가 이인성나무 즉 감나무로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의 2세다. 이인성은 누구인가?

 

"(李仁星1912.8.28∼1950.11.4) 서양화가. 대구(大邱) 출생. 보통학교를 나온 뒤 서동진(徐東辰)에게 사사, 수채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1930년 도쿄미술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제전(帝展)에 출품, 수차 입선하였다. 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제전에서는 준특선, 37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38년 개인전, 40년 김인승(金仁承)ㆍ심형구(沈亨求)와 함께 3인전을 가졌으며, 개인 아틀리에를 열어 후배를 양성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8ㆍ15광복 후는 이화여고 교사를 지냈고, 제1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작품경향은 인상파적인 감각주의에서 그의 이국취향과 토속적 소재를 발전시켰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 일제시대 선전(鮮展: 국전 전신)에 17세의 나이에 최연소 입선한 것을 비롯, 37세에는 최연소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현대미술 도입기에 구상회화(具象繪?)의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던 작가. 그를 천재화가로 부르는 것은 이미 10대부터 예술가적 재질을 인정받았다는 사실도 있지만, 20대에는 일본인들과 당당하게 겨루어 선전(鮮展)에서 연4회 특선을 차지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예술성 자체가 이미 20대에 완성의 형식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감나무 아래 등나무가 보인다. 나무 답사 길눈이  대구시 녹지과장으로 공직을 은퇴한 이정웅 선생님은 칡(갈:葛)은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며 등(등:藤)은 왼쪽으로 감고 올라가는 특성 때문에 둘이 만나면 갈등(葛藤)을 일으킨다고 재미나게 설명하셨다.

 

"이인성은 특히 초등학교만 나왔으나 후에 그의 재질을 아낀 지방의 유지들이 동경 유학을 주선했으며 반골적(反骨的) 기질로 기행(奇行)을 서슴지 않아 예술가적 고독을 혼자 되새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27세에 대구에서 다방을 경영한 적도 있으며 결혼한 지 4년만에 부인이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30대를 우울증과 고독으로 보냈다.

 

이인성 작업의 예술성은 그가 시도했던 유화(油畵), 수채화, 수묵화, 릴리프 등 다양한 매재(媒材)에 대한 실험 양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경쾌한 마티에르와 드로잉은 당시 일본 화풍에 젖어 있던 한국 서양화단에서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켰으며 분할묘법의 시도, 목가풍의 서정주의 등을 정착시킨 작가이기도 하다."

 

2007.06.1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