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스크랩] 공주...남매탑

임병기(선과) 2008. 6.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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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이전에도 서너번 스쳐간 답사길이었다. 공주시내, 무령왕릉,박물관, 갑사,공산성 그리고 이번 신원사 동학사 마곡사 반죽동 당간 솟대 장승 답사길이었지만 왕복 2시간 소요되는 남매탑은 늘 동경,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공주 다녀온지 사흘 후 드디어 인연의 끈을 잡고 계룡산을 올라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뵈었다. 함께한 150여 명의 동료들에게 건방지게 준비없는 說을 풀기도했다.

 

 

"남매탑(男妹塔)은 동학사와 갑사의 중간지점인 삼불봉 밑의 옛 청량사 터에 탑 2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5층(보물 제 1284호), 다른 하나는 7층(보물 제 1285호)으로 청량사지쌍탑(淸凉寺地雙塔)이라고도 불리우며, 남매탑이란 이름에 걸맞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통일신라시대의 한 스님이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울부짖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 있어 뽑아주었더니 며칠 뒤에 호랑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업고와 놓고 갔습니다. 은공을 보답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처녀는 상주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밤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스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때는 산에 눈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었습니다.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자 스님은 수도승으로서 남녀의 연을 맺을 수 없기에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 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주기를 바랬습니다.

 

이에 스님은 고심 끝에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써 불도에 힘쓰다가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들게되자, 이 두 남매의 정을 기리기 위해 탑을 건립하여 두 스님의 사리를 모시게 되어 "남매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출처 : 국립공원 계룡산 홈페이지

 

에~이 그럴리가? 하지만 나는 믿는다. 햇볕에 노출된 역사 보다는 달빛에 물든 야사,전설이 정겨웁기 때문이다. 열반에 드시면서 남긴 열반송이 궁금하기 그지없고 피안의 세계에서 부부의 연을 맺기를 기원하면 불경인가?

 

오빠인 칠층석탑은 1단의 기단,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은 다른 돌이며, 1층 몸돌에 장방형의 감실을 새겼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으로 이어지는 석탑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문화재청


 

동생인 오층석탑은 1단의 기단, 지대석과 기단은  4장의 돌로 조성되었다.

 

"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비인오층석탑(보물 제224호)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문화재청

 

 

어느 등산객도 눈길을 주지 않은 한시절 불상을 업고 있었을  안상이 고운 팔각 하대석이다. 그때 그시절에는 산골 암자의 주인공 측근이었는데...


 

거북모습의 주초가 여럿 뒹굴고 있다. 불상을 모신 전각 주초로 짐작되지만 영원히 법문을 전하라는 상징과 달리 석불은 윤회의 굴레를 벗지 못한 듯 하다.

수많은 인파가 방문하지만 오누이의 신심보다 돈독한 보살은 찾기 어려워 적막함이 싫증났던 그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200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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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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