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스크랩] 공주...동학사

임병기(선과) 2008. 6.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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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올해도 여흥을 주체 못한다. 겸사겸사 떠남에 익숙해서인지  따뜻하게 챙겨주는 마누라 고운 손길에 코끝이 찡해온다. 그렇게 새벽을 달려 고요를 밟으며 동학사 일주문에 이른다. 청도 운문사. 수도산 청암사와 더불어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  산속 옹달샘처럼 마알간 느낌의 절집이다.


 

신라 성덕왕(724년)시 상원조사가 기거한 암자로 시작하여, 도선국사 중창 고려 태조 때는 원당으로 삼았으며 볼모로 잡힌 두왕자를 구한 신라 충신 박제상을 배향하는 동계사를 지었던 인연으로 동학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적은 산위 남매탑으로 유추 가능하지만 멀리 막 잠에서 깨어난 부도는 조선시대 석종형처럼 보인다.


 

어느 절집이 정갈하지 않겠냐만은 비구니 주석 가람은 유난히 더 깨끗하다. 밟고 지나가기 겁 날 만큼 동학사 역시 그런 분위기지만  제사를 모시는 제향공간 때문에 정갈하고 엄숙하다.

그런 분위기를 망치는 대웅전 처마를 뒤집기 하려는 듯한 두 기의 큰 석등은 누구의 발원인지?

 

 

작은 중정을 안고 있는 대웅전. 협칸,어칸 꽃 창살이 매난국죽 사군자다. 어칸 가운데 두짝부터 좌우대칭으로 매난국죽 순이며 좌우 마지막 문은 복을 염원하는 1월의 나무 소나무와 학이 새겨져 있다.

 

전각 내외벽에 사군자가 그려진 절집은 쉽게 만나지만, 창녕 관룡사 약사전 내부처럼 매난국죽이 순서대로 묘사된 경우는 흔치 않다.  혹 유교의식으로 제를 모시는 공간이 세곳이나 모셔진 영향은 아닐까?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청량사지(계룡산 남매탑이 있는 곳)의 암자에서 옮겨온  탑으로, 1기단,   3층 몸돌은 멸실되었다.  기단 옥개석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었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얕게 새겼다.

지붕돌 받침은 5개, 초층 몸돌에는 문비가 보인다. 여러 기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탑으로 생각된다.


 

동학사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을 중심으로 3개의 전각이 있으며, 전각은 신라, 고려, 조선의 충신들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동계사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고려개국공신 유차달이 고려태조의 원당인 동학사를 유람하던 중 사중에 모셔진 박혁거세 및 박제상의 영정을 보고 박제상의 충열을 사모하여 경내에 ‘東鶴祠’라는 사당을 창건했다고 한다.

 

삼은각은 고려말 이성계에 저항 죽은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제를 지낸 단에 세운 각으로 현재 삼은각에는 3분이외에 금알 유방택, 도은 이숭인, 죽헌 나계종 위패가 모셔져있다고 한다.

 

숙모전은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세조의 명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세조는 동학사에 왔다가 삼은각 옆에 품자의 단을 보고 무슨 단이냐고 물었습니다. 김시습이 단종과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재를 지낸 단이라는 설명은 들은 세조는, 원통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토지를 내리면서 초혼각을 건립하라고 명하면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또 세조는 사찰의 이름도 동학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세조가 서서 울었다는 바위(자작바위)가 동학사 입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내력을 알고 있는지? 채 서리가 녹지 않은 건너편 개울 건너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이 사당을 지켜보고 있다. 세상 인연을 땅,물, 불, 바람에 넘기고 고해를 건너간 납자를 그리워하며...

 

 

 

2007.03.1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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