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옥천군

[스크랩] 옥천...정지용 생가

임병기(선과) 2008. 6. 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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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불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박인수 이동원의 불러 센세이션을 일으킨  '향수'는 정지용의 대표작이다. 그의 생가는 옥천의 옛 읍내에 있다. 지금은 널리 회자되지만 월북 시인이란 이유로 묶였다가 해금된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1990년초 유홍준 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남도 답사 일번지 강진 땅 영랑생가가 만인의 관심속에 있을 때도 지용은 일부 문인을 제외하고는 영랑과는 시문학의 동인이었음에도 잊혀진 시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월북작가로 묶은 정권의 안방마님 생가가  지용생가와 지호지간이며 죽향초교 동문이었으니 어떻게 설명해야하겠는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향수 노랫가사의 회돌아 나가던 실개천이 이렇게 변했다. 눈을 감으면 얼룩백이 황소의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이 들리려나?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다음 백과사전
 

 

아주 오래전 우리 가족 나들이길에 지용 생가를 들렸다. 지용에 대한 상식도 일천한 시절 강진 땅 영랑과 시문학 동인이며, '문장'지의 시 추천위원으로 조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등단 시킨 분이 지용이란 것을 일깨워 주신 분이 파란눈의 이방인이었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던 프랑스 여인의 얼굴이 아직도 또렷히 기억되는 까닭은 부끄러움 때문이었을텐데 아직도 오십보백보 진척은 고사하고 향수도 암송 못하고 있으니......

 


 

옥천읍내는 지용거리가 생기고  지용문학제, 지용문학관이 개관된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그의 시세계는 감히 언급할 수 없지만  우리의 고운 말을 찾아내고 다듬은 청록파가 '백록'이라는 지용 선생의 시집(?)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로도 선생의 시세계가 짐작이 가지 않을까?
 

2007.02.1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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