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읍내 답사만 하여도 하루해가 짧다. 크지 않은 작은 소읍에 선사시대~근세에 이르는 무궁무진한 답사처가 있는 지역은 아주 드물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자연환경, 비옥한 농토, 국방 요충지 등의 요인이 함축된 결과일 것이다.
술정리 일원을 거쳐 도보로 10분거리에 문화유산의 보고, 창녕시민의 쉼터인 만옥정 공원이 있다. 조선시대에 만옥정 정자에서 유래한 공원에는 입구에 관룡사 석장승 모형, 진흥왕 순수비, 퇴촌리 석탑, 객사, 대원군 척화비, 비림이 세월의 흐름을 거두고 서 있다.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는 잘못된 표현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세대는 그렇게 배웠다. 마운령.황초령.북한산,창녕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고...
공식적인 명칭은 척경비라고 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순수비에 모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임금이 나라안을 살피며 다니는 '순수'라는 말없이 다만 새 점령지 정책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을 뿐이기 때문에 경계를 넓혔을 뿐인 '척경비'가 옳다는 것이다"...돌베개/답사여행의 길잡이
하지만 순수비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으며 이도저도 아닌 다른 비석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쉽게, 단순하게 보면 555년 비화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6년후 561년에 이곳을 들리게 되었다는 기록 아닌가?
경주에서 멀리 창녕까지 엄청난 인원을 동원했을 행차가 한가지 목적이겠는가? 더구나 넓힌 땅구경이나 오는 한가한 부동산 업자이겠는가? 왕권강화, 가야 유민의 위무책, 초도순시에 공로가 있는 민관군 표창, 서훈 및 향후 점령지 통치철학을 발표하는 그런 내용을 기록한 비문이 아닐까?
고승의 부도탑비가 그러하듯, 진흥왕 순수비도 당시 사회, 문화, 관제, 서체, 지명, 인명 등등을 살펴볼 수 있는 더할 나위없는 소중한, 1500년을 지켜온 비석이다.
퇴촌리 삼층탑
퇴촌리 절터에 널부렂 있던 부재를 모아 1969년 복원한 탑이다.
상륜부가 멸실된 이기단 석탑이며 상기단 마모가 심하다. 신라 전형을 두루 갖추고었지만 4개로 줄어든 옥개 받침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하대탑으로 추정된다.
창녕객사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1924년 12월 군수 이장희가 시장 이설계획에 따라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5월 이곳 만옥정으로 이전하여 보수하였다.
창녕 척화비
척화비는 대원군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고 쇄국의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1871년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 가운데 하나이다.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만옥정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고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왼쪽에 작은 글자로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새겨져 있다.
2006.10.07 http://cafe.daum.net/moonhaw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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