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의 고장 창녕은 신석기 유적 부곡비봉리패총, 청동기유적 창녕유리지석묘, 창녕읍 송현․말흘리의 지석묘, 계성면계성리․사리지석묘군, 영산면죽사․신제지석묘군, 고암면괴산리지석묘군, 도천면일리․도천리지석묘군, 부곡면온정리․구산리지석묘등 천여기의 지석묘가 폭넓게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아득한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터를 닦고 이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창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에 나오는 「辰․弁韓 24國」중 不斯國이 최초이며 고려시대 일연의「삼국유사」五加耶條에 「非火加耶」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고구려․백제와 더불어 가야연맹체로 비화가야로 대각도치형 창녕식토기와 大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의 출토로 보아 정치적, 문화적 독자성을 유지하며 장구한 역사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아득한 옛날 자연적 방어시스템인 낙동강 동쪽에 자리잡은 여타 가야연맹과 달리 비화가야는 강대국 신라와 비슬산맥을 경계로 지리적으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가야제국들의 최전선에서 신라세력의 동진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비화가야의 고분에서 나오는 수많은 무기류와 개지극(가지극)은 철기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개지적(가지극)과 목마산성(牧馬山城)이란 이름에서 알수있듯이 일찍이 발달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철기병을 가진 우수한 군사력을 가지고 때로는 화친을 때론 강력한 군사력으로 맞서며 600여년을 굳건히 역사를 공고히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554년 백제․가야연합군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에 대패하여 555년 비화가야를 시작으로 562년에 대가야의 멸망으로 600여년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출처/우포와 화왕(http://cafe.daum.net/uponhwawang )
창녕. 잊혀진 제국 비화가야를 오롯이 들추고픈 발원으로 경주에 버금가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운 님들의 숨결은 골목골목 짙게 드리워져 있다. 술정리 동탑은 서라벌 폐사지처럼 넓은 터를 가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고픈 소박한 불심 때문에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탑이다.
꾸밈이 없어도, 내재된 가치를 발산하지 않아도 늘 술정리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고을맥이 수호신으로 살아가던 탑이었다. 새마을 운동, 근대화의 이기도 벗어난 빛바랜 사진첩 속 60년대 고향 마을을 옮겨 놓은 듯한 주변 분위기에 젖기도 했는데 이제 그 마져도 사치로운 추억이 되었다.
술정리 동탑...누들스 사진
일반적으로 고려는 12세기 예종, 조선은 정조 시대를 문화의 전성기로, 신라불교문화 정점은 경덕왕 재위인 8세기 중엽으로 본다. 이시기에 석탑도 불국사 탑을 중심으로 신라 전형의 패러다임을 갖추게 되는데 서라벌을 벗어난 지방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창녕 술정리 동탑은 청도 봉길리 석탑, 국립박물관에 옮겨간 김천 갈항사지 쌍탑과 더불어 완성기 서라벌 문화사조(?)에 충실한 탑이다. 술정리 동탑을 제외한 두 탑은 쌍탑이지만 갈항사지 석탑 명문 처럼 왕실의 직.간접 지원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체형은 줄어들었지만 후기 석탑처럼 비만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아름다움이다. 상륜부만 갖추었다면 백제 석공에 견줄만한 비화가야 피가 흐르는 석공의 신심을 톱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중 기단, 2:3:4의 탑신 체감, 5개 옥개석 받침, 상하기단의 두 개 탱주, 사알짝 들어올린 처마의 반전. 기단부 안정감과 몸돌 체감에서 느끼는 상승감이 균형을 이루어 아무리 쳐다보아도 눈이 피곤하지 않지만 더이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위선일가 두렵다.
술정리 서탑..누들스 사진
술정리 서탑. 동탑에 편년이 뒤떨어 진다. 모두들 동탑. 동탑만 외치고는 떠나가기에 늘 한적한,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탑이었다. 이중 기단, 상.하기단은 지대석과 한돌로 만든 8개 돌로 구성되었고, 상기단에는 얕은 안상을 면석에 두개씩 새겼다.
상기단 남쪽면에 끼워져 있는 돌에는 거친 문비, 다섯개의 옥개석 받침, 낙수면이 얇고 평평하며,처마 반전이 뚜렷하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이 남아 있다.
술정리 동탑과 상당히 떨어져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으로 여겨진다. 남도 절집 부도 순례시 연곡사 동부도를 마지막에 탐방하라는 불문율처럼 동탑보다 먼저 찾거나 건너 뛰던 탑이었다.
요즘은 예쁜 아가씨 보다, 넉넉한 아줌마가 아름답게 느껴지듯 서탑도 놓치지 않는 까닭은 노련, 노회일까? 엉큼은 아니겠지?
직교리 당간지주
술정리 서탑 개울건너 세월을 비켜간 주택가 좁은 골목에 옹색하게 서 있다. 불과 얼마전 동서탑 처지와 진배없다. 당간지주 앞에는 가족의 안녕, 사악한 기운 접근을 바라는 소박한 촌부의 정성이 남아 있다. 당신들에게 당간지주도 미륵불.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한쪽 지주 상부에 작은 기둥을 깍아 놓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지만 구금당한 느낌이 가슴 아프다. 빠른시일내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었으면 좋겠다.
송현동 석불좌상
입구에서 만난 아주머니 네분 표정이 재미있다. 그네들은 만만치 않은 체구로 땀을 흘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먼지를 품으며 달구지를 타고 스치는 내가 미웠으리라.
송현동 석불은 바위에 높게 돌출된 고부조로 마애불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와 대좌가 한돌로 되어있다. 민머리, 낮은 육계, 항마촉지 수인, 우견편단,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여 유순한 모습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다. 긴장감, 자신감이 부족한 석불은 전성기에 비해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진 통일신라 후기 불상이다.
그나저나 이 세상 최고 석불 전문가로 자처한 나에게 속아 넘어간 네 분의 진주 아주매 옛님에 가입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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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탑,금당 치성문기 비/문화재청 |
창녕에서 놓칠 수 없는 문화유산이 인양사 종을 세운 혜공왕 7년(771년)부터 이비석을 세운 헌덕왕 2년(810)년 까지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 소요된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한 탑금당치성문기 비다.
방형 지대석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불사에기여한 고승을 기리기 위해 새겨놓은 것이라 추정된다고 한다.
2006.10.07
http://cafe.daum.net/moonhaw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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