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안군

[스크랩] 함안 / 생육신 조려...어계고택, 채미정, 서산서원, 무진정

임병기(선과) 2008. 6. 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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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려'  조선 전기의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사람.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할아버지는 고려말 공조전서 열(悅)이며, 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안(安)이다. 1453년(단종 1) 성균관진사가 되었으나,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추복(追復)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703년 경상도 유생 신만원(辛萬元) 등의 사당 제향 건의에 따라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 등 다른 생육신과 함께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계집〉이 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어계고택 솟을문

 

문간칸은  3칸으로 가운데 문을 높여 세운 솟을대문을 두었고 양쪽은 방으로 만들었고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원북재


어계고택, 원북재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건물로 본래는 사랑채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재실로 사용중이며 전면 4칸·측면 2칸 규모로  두리기둥,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며, 양쪽은 툇마루를 단 방을 1칸씩 두었다.


조묘

 

사당은 3칸 一자형 평면에 툇칸이 있는 맞배지붕이다. 창방위에는 꽃문양이 보이며 어계선생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묘 현판이 걸려 있다.

 

채미정

 

정면4칸 측면 3칸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을 방으로 하고 주위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어계고택 마을앞에 위치하며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따먹고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채미(菜薇)는 곧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채미정 현판보다 큰 백세(百世), 청풍(淸風), 왼쪽 동산의 청풍각도 같은 맥락이다. 채미정은 서산서원의 부속건물로 서원 훼철시에도 유지되었으나 육이오 동란시 소실되어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채미정 솟을문

 

양쪽에 방을 단 솟을문은 경전선 부설로 인해 대문 기능을 상실하고 퇴락한 모습이 무척이나 지쳐보인다. 지붕 가득 풀이 자라고 문창살은 훼손되었으며 금방이라도 열차 진동에 일순간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다시 함안으로 나오며 서산서원을 들리지 않아 안타까움 금할 수 없다.

함안 대산리 무진정 영송루

 

무진정은 어계 조려 선생 손자인 무진정 조삼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로 사진에 보이는 무진정 연못 가운데 육모지붕 정자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장소인  영송루(迎送樓) 이다.

무진정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집의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

문이 닫혀 담너머 보이는 무진정은 수리가 시급해 보인다. '무진정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정자는 팔작지붕이며,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라고 한다.

 

2006.06.2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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