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강릉시

[스크랩] 강릉 / 선교장...조선 후기 양반 가옥

임병기(선과) 2008. 6. 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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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절 경포호를 배 타고 왕래했다는  배다리 마을에서 유래된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가선대부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1703∼81)이 입향한 집이다.

 

 이내번은 한 떼의 족제비가 일렬로 무리 지어 서북쪽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 광경을 신기하게 여겨 뒤를 따라갔는데, 이 족제비떼가 지금 선교장이 들어선 땅 부근의 숲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내번은 이곳이 명당이라 판단하고는 선교장을 지었다고 한다.

 

 

활래정

 

선교장에서 제일 먼저 맞이하는 활래정이다. 조선후기에  일반 양반가 집안에 연꽃을 심고 정자를 조성하게 되는데 예전에 읽었던 허준의 정원의 상징세계(?)라는 책에 의하면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귀이며, 사사로움에 물들지 않은 연꽃은 군자로다는 글에서 유래되었다고 기억된다. 경복궁 향원정, 보길도 부용정도 애련설의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유래한 정자이다.

 

그러나 활래정은 주자의 관서유감 중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근원으로부터 맑은 물 흘러오기 때문이네)에서 따온 정자다. 연꽃이 만개한 여름날 들어열개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바라볼 기회를 갖고 싶다.

 

아쉬운 것은 연지와 기운데 섬이 모두 방형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연지를 방형으로 , 도교의 삼신사상을 상징하는 섬은 원형으로 조성하여 天圓地方 사상에 준한 조경을 한다. 하지만 활래정에는내가 모르는 어떤 내력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솟을대문, 행랑채


활래정 마루에 걸터 앉아 마냥 바라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고 진입하니 잘 훈련된 병사들이 열병을 위해 도열한 모습의 긴 행랑채와 솟을 대문이  보인다. 촌놈 출신이라서 절제되고, 엄격한 美보다는 어슬프고 투박한 것에 익숙한 내눈에는 낯설다.

 

솟을 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 현판이 걸려 있다. 즉 신선이 사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일진데 미천한 중생에게는 그윽함은 고사하고 화려함으로 치장한 느낌을 지울 수 없으니...

 

사랑채 悅話堂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인 열화당은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철저한 신조로 삼았던 '이후'가 1815년에 지은 건물이다"(답사 여행의 길잡이)
 

悅話堂은 '즐겁게 이야기 하는 집'의 의미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悅親戚之情話)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인물됨을 미루어 알 수 있는 당호 같다.

 

중사랑채

 

중사랑채는 사랑채 주인이 되기 전까지 거처하는 공간으로 마루, 기단이 열화당 차이를 두어 은근히 위계를 강조한 우리네 전통 한옥의 구성을 엿볼 수 있다.

 

서별당

 

열화당에서 안채로 가기전 동별당과 대칭되는 서별당이 있다. 서재와 서고로 활용했던 건물로, 복원하면서 기단을 너무 높게 쌓아 사랑채 기단과 대비된다. 

 

서별당

 

서별당 측면 건물로 개화기에 신학문을 가르쳤던 동진학교가 있었던 자리다. 서별당 앞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금전이나 곡식을 받아들일 때 사용했다고 한다.

 

안채

 

안채는 선교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영조 때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은 안방 안주인의 방이고, 좌측 건넌방은 며느리 방이다.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줄은 안방주인이 양반의 신분으로서 신을 신을 때 허리를 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잡고 신을 수 있도록 매단 것이라 하지만 왠지 쓴 웃음이 나온다.

 

연지당

 

안채 앞에는 살림을 도와주던 이들을 위한 연지당 있다.

 


동별당/ 문화재청

 

동별당 사진이 내 허락없이 도망가서 문화재청 사진을 가져왔다.

동별당은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 가족끼리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외별당

 

외별당은 분가한 가족이 살던 건물로 근래에 복원하였다.

 

사당


정침 오른쪽에 위치한 사당은 전통 가옥 구조에 충실했다. 이는 밤새 사악한 잡귀들이 가장 먼저 햇빛을 받고 신성공간인 사당에서 물러가라는 상징으로 해석하면 된다. 물론 주자가례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고 한다.

선교장

 

돌아나오다 찍은 사진인데, 선교장이 양택풍수에 적합한 길지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조용헌 교수의 글을 발췌해 왔으니 답사시 참고 바란다.

 

선교장에 이처럼 방이 많았던 이유는 부자집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한 숙박시설이었다는게 후손들의 증언이다. 대관령 넘어 관동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선경이라 일컬어졌다. 금강산, 설악산, 경포대에다가 영랑 선인이 놀았다는 영랑호까지 끼고 있어서 전국에서 많은 유람객들이 몰려왔다.

 

이 유람객들은 대부분 관동의 첫째가는 부자집인 선교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관동의 제일 가는 호텔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공짜였다. 역대 선교장 주인들도 손님들의 무전취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6.·25때 폭격으로 소실됐지만, 이 집에는 1인용 7첩 반상 그릇이 300인용 가량 보관돼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손님을 접대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열화당’이라는 사랑채의 당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선교장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담론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생을 사는 의미와 보람이 바로 즐거운 대화에 있다는 독특한 철학을 가졌던 것이다


대접도 후하고 경치도 일품이다 보니 손님들이 선교장에 오면 몇 달이고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면전에 대놓고 떠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과객이 지나치게 오래 머문다 싶으면 간접적으로 그 의사표시를 했다.

과객의 밥상을 차릴 때 국그릇과 밥그릇을 바꾸어 놓거나, 간장종지 놓는 위치와 김치 놓는 위치를 바꾸어 놓는 방법이었다. 손님 상차림에도 반찬그릇 놓는 위치가 각기 정해져 있었던 법도의 시대였으므로, 국그릇의 위치변동은 이제 그만 떠나주시라는 간접적인 의사표시로 인식되었다. 위치가 바뀐 밥상을 받은 과객은 아무 말도 않고 다음날 곧바로 보따리를 싸서 떠나곤 하였다.

선교장은 학자와 예술가들의 산실(産室)이었다. 권력이나 금력이 아닌 ‘열화’(悅話)에다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두었던 선교장 주인들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패트런(Patron) 역을 자청했다. 14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배후에는 화가와 조각가, 음악가들을 후원한 메디치 가(家)가 있었듯이, 선교장은 당대 조선의 화가와 음악가, 시인들을 키워낸 관동 지역 고급 문화의 산실이었다.

조선 헌종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인영(趙寅永), 구한말 소론의 8천재 가운데 하나였던 정만조(鄭萬朝), 대원군으로부터 천재소리를 들었던 서예가 소남(小南) 이희수(李喜秀), 전국 사찰에 수많은 현판글씨를 남긴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중국 원세개의 옥새를 새겼던 김태석(金台錫), 당시 영동 제일의 화가로 평가받았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등이 선교장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들이다.

이들 서예가와 화가들이 남긴 각종 책자들과 화첩들이 10톤 트럭으로 한 트럭분 가량 선교장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해강과 차강은 여기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고, 가난한 예술가였던 그들의 생계를 선교장에서 도맡아 해결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선교장 주인들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할 때마다 신랑·신부에게 줄 선물로 들고 간 것이 해강의 글씨와 차강의 그림이었다고 할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선교장의 전성기 주인이었던 이근우(李根宇·1877~1938)는 거문고를 특히 좋아했다. 전국의 거문고 명인들이 선교장의 활래정에 초대받아서 두툼한 사례비를 받으며 몇 달씩 묵어가곤 하였다. 활래정은 연꽃밭 속의 정자였지만 온돌 시설을 갖춰서 겨울에도 손님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때 연주했던 거문고 악보들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근우는 출판에도 남다른 관심이 깊어서 사랑채인 열화당에다 활자인쇄 시설을 갖추고 문집과 족보를 찍었으며, 1910년대 부터는 각지의 명사들에게 보내는 연하장을 직접 인쇄하여 돌리기도 했다.

 

현재 출판사 열화당 사장인 이기웅(62)씨도 선교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집 후손이다.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으로 짓고, 돈도 되지 않는 고급스런 미술 출판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선교장 사랑채인 열화당의 인문정신(人文精神)을 계승한다는 의지가 한몫하고 있다. 선교장이 지닌 문화 패트론 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선교장에 대한 또 다른 호칭은 ‘통천댁’이다. 19세기 초~중엽 선교장 주인이었던 이봉구(李鳳九·1802~1868)가 강원도 통천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단순히 통천군수를 지냈다고 해서 통천댁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종손인 이강륭씨는 통천댁은 주변 사람들의 존경이 담겨 있는 특별한 호칭이라고 말한다.

 

이봉구는 영동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선교장 쌀 창고에 저장돼있던 곡식을 전부 풀어 지방민들을 살렸다. 관동 사람들은 그 적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교장을 통천댁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매년 수만석의 소출이 있던 이 집의 쌀 창고는 4군데였다. 동창, 서창, 남창, 북창이 있었다. 남창은 삼척에 있었고, 북창은 강원도 고성에 세워져 있었다.

 

선교장 자체 내에도 커다란 쌀 창고가 있었는데, 1000석 이상 들어가는 창고였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정황을 참작하면, 통천 군수가 영동 흉년에 내놓은 쌀의 양은 아마도 5000석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8인 가족이 1년간 소비하는 쌀의 양이 평균 5가마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액수였다. 통천댁은 평소에도 소작인들을 후하게 대했다.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1만명의 소작인들이 자기 이름을 써넣은 ‘만인솔’이란 우산을 만들어줬다. 지금도 통천댁은 옥양목으로 된 만인솔을 집안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생각하고 있다.

2006.03.1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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