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스크랩] 영주 순흥 / 청다리, 압각수...잘못 알려진 이야기

임병기(선과) 2008. 6. 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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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누구나 듣고 자랐을  '너의 엄마가 다리밑에 버리고 간 것을 주어와서 키웠다'라는

이야기에 나오는 다리가 소수서원-- 선비촌 사이의 작은 다리인 청다리로, 단종 복위에 연루

된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과 많은 지사들의 한많은 사연이 깃든  다리이기도 하다.

 

 

아직도 많은 책,자료에는 아래와 같이 청다리을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유홍준 청장의 답사기

이후 수많은 동호회가 결성되고, 소수서원,부석사 코스가 답사의 메카(?)로 급부상 되었지만

대부분 청다리에 얽힌 잘못된 사실을 여과 없이 수용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가 '답사 여행의

길잡이' 경북북부 편에 기재된 글 때문이 아닐까?

 

 

"영주시 순흥에는 북쪽으로 약 1㎞쯤 떨어진 곳에 소수서원이 있다.

이 소수서원을 끼고 죽계수가 흐르고 있으며 순흥에서 부석으로 통하도록 죽계수 위에 놓여진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청다리"라고 한다.

 

주세붕 선생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그만 둔 학자와 청년들이 많이 모

여서 학문과 덕을 닦았다. 한편 이곳에는 숲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맑아 주위에서 이 곳의 경치를

따를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학자와 청년들은 이 곳이 풍류를 즐기기에 제격이었으므로 때

때로 기생을 불러서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서로 놀다가 정이 들어 사생아를 낳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이러한 사생아를 기를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생아들을 죽계수 위에 놓인 청다리 밑에다 버렸다. 당시에 자

이 없고 후손이 귀한 집에서는 이러한 아이를 많이 주워다 길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할아버지

머니들이 어린이들을 달랠때에 "너는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너의 어머니는 청다리 밑에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린다"라고 한다.청다리라는 말도 꽃같이 젊은 기생들과

연이 깊은 뜻에서 상징한 이름이라고 한다."...출처/다음

 

 

제월교(霽月橋)/청(菁)다리...출처/다음

 

그시절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죽계천 청다리에는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가 음각된 돌비석

이 서있어  나를 상념에 젖게 한다. 무너진 유교 질서를 바로잡고 이어가겠다  의미로 소수(紹修)

라 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다리 이름마져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비유한 光風

霽月에서 가져오다니...

 

멍청한 중생이라 제월교의 건립시기를 다이어리에  康熙로만 메모해서 정확히는(현종,숙종,경종)

알 수 없지만 아마 숙종 때라고 보여지는데, 간송파에 의해서 우리문화의 진경시대의 시작이라고

하는 숙종시대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을까?

 

청다리 아래서 주어왔다는 이야기의 진실은 무엇일까?

 

"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선비를 모으고 삼남(三南) 유림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하면서 당시 동조했던 이 지역 수백 명의 선

비들과 그 가족들이 희생되었다(정축지변·1457년). 그때 어렵사리 살아 남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실 제월교(속칭 청다리)는 단종 복위사건으로 암울하고 참담했던 역사가 끝나고 훗날 선비들이

'개성 송도는 선죽교, 영주 순흥에는 제월교'라고 했듯이 충절이 배어 있는 다리로 기억돼 오고 있

다. 그러나 청다리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과 마을 처녀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를 다리 밑에

버린 것에서 유래됐다는 잘못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박석홍(52) 영주시 학예연구원은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된 유림들

을 없애고자 유생들이 연애하여 낳은 자식들이라고 왜곡시켰다"며 "단종 복위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혁파 될 때 군인들이 주민들을 살해하면서 살아남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생부모를 몰라 청(菁:여

성의 다리)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은유법을 사용했다"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출처/다음

 

압각수(鴨脚樹)는 금성단 뒤편에 있는  은행나무로 오리발 처럼 생겨셔 그렇게 불려지며 역시 단종

위와 금성대군과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수령이 1000년도 넘은 은행나무는 금성대

군 죽음 후 말라죽었다가 순흥 도호부가 복권되자 소생했으며,동네에서는  동신목(단종의 몸)으로

모시고 정월 대보름이면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금성단...사진 문화재청

 

좌측이 압각수로 불리는 은행나무며 그 뒤쪽이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우측 상단 소나무에 둘러쌓인

건물이 순흥향교다.     2005.08.2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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