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청도군

[스크랩] 청도 / 운강고택

임병기(선과) 2008. 6. 6.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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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를 벗어나 운문댐 건설로 인해 새로 조성된 대천읍을 지나 금천면 신지리의 운강 고택에 이른다.
운강은 퇴계학파에 속하던 유치명의 문인으로 호를 운강(雲岡)이라 썼던 박시묵(朴時默)을 말하며, 
그가 1829년 옛집을 중건하고 금천가 벼랑 위에 별서(別墅) 만화정을 새로 지었다. 
운강고택이란 집이름은 그의 호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뒤로도 1912년 사랑과 안채를 크게 중수하고 
가묘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언제나 그랬지만,밀양 박씨 집성촌인 마을을 두동강 낸 도로가 눈에 거슬린다.운강이 터를 잡고 집을 
지었을 당시에는 맑은 물이 사사사철 비단내를 감돌아 흐르는 한곁으로 길이 이어졌을텐데, 모르긴해도 
국토를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우리 민족정신 말살의 일환으로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를 내면서 이렇게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운강고택의 경우도 우리 한옥의 진입로의 전형처럼 골목에서 대문으로 이르는 고샅은 ㄱ자로 꺽어져 있다.
이러한 까닭은 골목과 대문이 정면으로 연결될 경우는 찬바람과 사악한 기운이 집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다는 민간의 믿음으로 함양의 정여창 고택의 고샅처럼 바닥에 박판이 있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바램일까?
운강고택의 솟을 대문에 대해서 많은 답사관련 책,자료에는 천편일률적으로 "솟을대문의 경우 대문간이 
집의 중앙에 와서 대칭을 이루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두 번째 칸에 대문을 설치하여 집의 양쪽이 비대칭이다. 
균형을 깨뜨리는 모습이 오히려 묘한 미감을 낳는다" 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단지 답사 매니아인 나의 시각으로 이야기 해보자면, 현재의 고샅 기준으로 대문이 정중앙에 
왔다고 가정해보면 좌측의 행랑채가 용도불명의 깊이로 인해 꾸어온 보릿자루 처럼 모양새가 영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중앙에 대문을 낸 후 현재의 대문에 이른는 고샅쪽에 담을 쌓는 다면 행랑채가 반쪽으로 보이기에
주어진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솟을대문이 있다고 여긴다면. 미적감각이 없는 무식한 놈으로 
취급 받을까?
고택은 남부지방의 가옥배치(호남은 한 일자형이 주류)인 ㅁ형으로,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튼 ㅁ자형 
건물군이 앞에 나서고 그 왼쪽 뒤편으로 안채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튼 ㅁ자형 건물군이 이어지면 
사랑채가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이다.  
큰사랑채는 남성의 주거공간임을 알려주는 굴도리에 작은 사랑채 보다 상위의 건물임을 암시하는 두벌대 
기단(작은 사랑채는 외벌대)에 화려하지 않는 홑처마 건물로 마당에 반사되어 오는 빛을 최대한 수용하기 
위한 서까래의 물매를 눈여겨 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곳간 옆 사랑채와 연결된 2칸 방은 내당 여인들이 친가에서 온 남정네와 상면하던 방이다. 
뒷사랑과 곳간채가 이어져 있는데 이어지는 곳의 마루 아래를 터서 조그맣게 따로 협문을 내었다. 
안채에서 사랑채 뒤뜰과 내외문을 지나 대문에 이르는 통로로서 내외문과 마찬가지로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문이다. 뒤사랑의 앞면에는 툇마루를 달고 아자난간을 설치하여 
잔잔한 멋을 내었다." 
내외문 만큼 운강고택에서 시각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사랑채와 중문 사이의 꽃담으로 깨진 암수 기와를 
활용하여 길상을 의미하는 吉자와 아마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등처럼 보이는 문양이 어우러져 있다.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마주보는 중문을 들어서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 영역으로,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남북으로 긴 건물로 안방에는 찬마루와 찬방이 부설되어 있고, 마루 아래는 칸마다 두꺼운 널을 
걸쳐 디딤돌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 마당에는 둥글게 화단이 조성되 있으며 이는 외간 사람들이 출입하였을 시 시선을 바로 안채로 
향하는 것을 방지함과, 사랑채 옆 내외문-협문을 통해 안채로 출입시 안채로 집중되는 시각의 분산을 
유도하기 위한 것은 아닐런지?
"행랑채는 오른쪽부터 부엌, 방, 마루, 고방, 방앗간이 배열되어 정면의 모습이 다기롭다. 
판자에 네모꼴을 크고 작게 뚫어 부엌 벽에 낸 봉창과 부엌문 위의 넉살창은 구성이 재미있다. 
곳간채의 널문에는 거멀쇠장식이 두드러진다. 뒷면 벽은 아래와 위를 구분하여 아래는 통나무를 
적당히 다듬어 세로로 길게 이어 맞춰 곳간을 든든히 하였다." 
문이 잠겨져 있어 바로 출입을 하지 못했지만,나중에 문을 열어주신 사람좋게 보이는 종손(?) 어른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밀양 박씨 종친회에서 오신 듯한 분들과 사랑채에서 담소를 나누고 계서 
아쉬움이 남는다.
고택은 엄격한 건물 위상, 유교 정신에 입각한 절제,내외의 구분, 환경 친화적인 재료의 활용, 
자연속에 자연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는 택지 환경의 극대화 등을 눈여겨 볼 만 하지만,
무엇보다 요즘의 세태에서, 우리가 느낄 것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우러나는 동기간의 우애, 
자연스럽게 어른을 알고 모시는 효의 자양분의 조기 배양 등이 아닐까?
고택 답사시에는 늘 맘이 편치 않은 것은 지금의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과연 누가 보존 할 것인가 
하는 우려가 머리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단지 고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효, 문화, 사상마져 잊혀지는 것이기에, 
잊혀 진다는 것은 서글픔이기에....
2004.04.1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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