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여수시

여수...거문도 영국군 묘지

임병기(선과) 2025. 9. 1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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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島. 거문리

거문도는 크게 동도. 서도. 고도 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도는 거문도의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여객선터미널. 숙박시설 등이 있습니다.

고도

거문도등대 가는길에서 바라본 뷰

 

이른 아침 고도 뒤산인 회양봉 둘레길 초입에서 영국군 묘지를 만났습니다..

거문도와 영국군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 해군이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 약 2년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거문도 점령 사건이다.

당시 영국군은 거문도를 해군 제독 윌리엄 베일리-해밀턴의 이름을 따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불렀으며 섬 사람들은 이 이름을 따 '보도 해밀도'라 불렀다고 한다. 거문도는 당시 열강이 주목할만한 위치에 있는 섬이었고 실제로 영국도 임대 의사를 밝히는 등 홍콩처럼 영국의 해외 조차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차를 했다고 해도 홍콩 섬의 1/5, 홍콩 전체의 1/100 수준으로 면적도 좁고 정주여건이 열악한 편이라 수용할 수 있는 인구 수가 제한되는 등 한계가 있어 여느 영국령 군소도서처럼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문도 주둔 당시 영국군 규모는 200명 내지 300명에서, 최대 700~800명까지 주둔했으며 군함도 5척내지 6척에서 최대 10척까지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거문리 뒷산 중턱에 옛 거문초등학교가 당시 영국군의 주둔지였다.

결론적으로 불법점거이긴 했지만 영국해군은 주민들에게 일을 시키고 급여를 주는 등 근대적으로 대했고 섬의 여성들에게 젠틀하게 대하고 가급적이면 농담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수병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식민지들에서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탄압과 식민지내에서의 갈라치기 분열 정책으로 악명을 떨친 영국의 이미지와는 완전 다른 면을 보였다. 그 동안 국가로부터 1원 한푼 받아 본적이 없던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해군 철군당시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한다.
현재 인터넷을 검색하면 당시 영국인들과 거문도 주민들의 기념사진을 볼 수 있다. 편안하게 앉아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호기심 어린 눈빛의 댕기머리 소년, 갓 쓴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측 기록에는 마을 주민들은 매우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나 위생적으론 좋지 못하고 전함으로 초대할수 없을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무명국가의 섬사람들 답지않게 외국에 대한 궁금증, 세상 돌아가는 식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청소년층에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배워 영국군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한 이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담배를 주지 않으면 영어로 욕을 해서 영국군이 난감해 했다고. 시간이 흐른 1960년대, 이들 중 일부가 90대~100대의 고령이 되어 정부의 진상조사에서 당시 역사의 산 증인으로 영어 회화나 영국 민요들을 증언해 주기도 했다.

영국군이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일도 안 하고 노는 걸 보고 주민들이 왜 노냐고 물어봤더니 "일요일이라서(Sunday)"라고 대답했고, 이에 거문도 주민들도 노래하고 노는 문화를 '산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수병들이 자주 쓸 법한 코크니 억양으로는 실제로 '산다이'처럼 들린다. 단, 순우리말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다.
영국이 점거할 만큼 해상의 요충지이다 보니 등대도 비교적 빨리 설치되었는데, 영국군이 철수한 후 거문도를 차지한 일본이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에 등대를 설치했다. 하지만 섬의 면적이 작아서인지 딱히 해군 기지로 활용되진 않았고 실상은 지리적 위치로만 의미가 있었다.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 해군도 중간 기항지 및 해안포 기지로만 활용했다. 일본의 경우 1880년대부터 거문도를 전진 어업 기지 및 해안초소로 활용했다.(나무 위키에서 발췌)

 

영국군 묘지

현장 안내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경락사는 경략사, 이원희는 이원회의 오기입니다

 

고종실록24권, 고종 24년 3월 17일 을사 1번째기사 1887년 조선 개국(開國) 496년

내무부에서 거문도의 유자리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아뢰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의 별단(別單)을 보니, ‘거문도(巨文島)의 유자리(柚子里)가 진영(鎭營)의 기지로 합당합니다만, 진영을 설치하고 조치를 취하는 등의 일은 오직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섬은 바다 관문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진영을 설치하고 장수를 둔 다음에야 변경의 방어를 공고히 할 것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해도(該島)의 첨사(僉使)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차출하여 재촉해서 내려 보내되 변지과(邊地窠)로 시행하고 임기는 30개월로 정하소서.그리고 해마다 지급해야 할 녹봉과 관청을 건립하는 문제, 군함과 무기를 준비하는 방도를 충분히 강구하여 설명을 갖추어서 등문(登聞)한 뒤에 재가(裁可)를 받아 처리하도록 해도(該道)의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983년 건립

한영수교 100주년 기념

토마스 올리브와 헨리 그린 묘비 1886년

군함 크레호 수병

알렉스 우드. 1903년

군함 알비욘

영국군 (사진. 묘소 안내문)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 거문도 영국군 관련 자료는 여럿 보입니다.

 

고종실록22권, 고종 22년 3월 10일 기유 3번째기사 1885년 조선 개국(開國) 494년

북경주재 영국 사신이 거문도 문제로 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에게 조회하다

북경(北京)주재 영국 서리흠차대신(署理欽差大臣)이 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독판(督辦)에게 조회(照會)하였는데, 조회 내용에, "대영국의 서리편의행사대신(署理便宜行事大臣)으로서 조선과 교섭하는 일을 맡은 1등 참찬(一等參贊) 오코나〔歐致〕는 대조선 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대신(督辦大臣)에게 조회를 보냅니다.

 

본 대신은 지금 본국에서 온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뜻밖의 일에 대응 방비하기 위하여 본국의 수사관(水師官)에게 대조선국 남쪽의 작은 섬인 영어(英語)로 해밀톤〔哈米𥫱〕이라고 하는 섬을 얼마동안 차지하고 대조선국 정부에 비밀리에 이러한 내용을 통지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사유를 서로 공문으로 알려야 하겠기에 통지하는 바이니 잘 알 것입니다. 1885년 4월 24일." 하였다.

 

고종실록22권, 고종 22년 3월 20일 기미 7번째기사 1885년 조선 개국(開國) 494년

중국 북양 대신 이홍장이 거문도 사건과 관련하여 편지를 보내오다

중국 북양 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거문도(巨文島) 사건과 관련하여 보내온 편지에,

"귀국의 제주(濟州)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문도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 섬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阿富汗〕 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톡〔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香港〕을 침략할까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에 속한 것으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水軍)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 사람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위해(威海) 지부(之罘), 일본 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 사람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하였다.

 

고종실록24권, 고종 24년 4월 17일 갑술 2번째기사 1887년 조선 개국(開國) 496년

거문도를 점거했던 영국 사람들이 철수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거문도(巨文島)를 점거했던 영국 사람들이 지금 이미 철수하여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례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앞으로 갈 사행(使行) 편에 방물(方物)을 갖추어 표문을 바치겠다는 뜻으로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자문(咨文)을 만들어 먼저 북경(北京)의 예부(禮部)에 알리고, 이번에 별사(別使)를 보낼 때 붙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자문에 거문도 문제가 해결된 데 대해 말하기를,

"우리나라 거문도를 영국(英國) 사람들이 점거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물러가라고 독촉하면 그냥 질질 끌기만 하므로, 각 우방들에 조절해서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으나 혹시 다른 나라와의 좋은 관계를 훼손시키고 도리어 사단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이럭저럭 우선 참고 있으면서 약한 나라의 영토가 줄어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조(天朝 : 청(淸) 나라)에서 자기의 영토처럼 특별히 생각하고 어느 날 사리에 근거하여 잘못을 책망하니, 그들도 그만 군함을 돌려세우고 모든 시설물들을 철수하여 이지러진 것이 완전하게 되고 기울어졌던 것이 바로 잡혀서, 이후부터는 다른 나라들이 감히 엿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문을 보냅니다."하였다.

영국군과 거제도민 (사진. 묘소 안내문)

묘지를 뒤로하고 둘레길로 향했습니다.

인적 없는 둘레길

그런저런 상념도 잠시, 일출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202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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